[인터뷰] 뮤지컬 <글루미데이> 배우 정문성

[엔터미디어=공연전문기자 정다훈] “현해탄에서 뛰어내린 두 남녀의 죽음을 비극으로 보고 슬프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그 이후의 행방에 대해서 궁금증을 내보이기도 해요. 하지만 전 우진과 심덕이 꼭 껴안고 뛰어내린 그 잠깐의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죽든 살든 그 뛰어내린 몇 초 동안 굉장히 서로 사랑하고, 상대에게 의지하지 않았을까요. 두 사람에게 주어진 상황에선 가장 행복한 결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DCF 대명문화공장 비발디파크홀 개막작, 뮤지컬 <글루미데이>는 격동의 시대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극작가 김우진과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의 아름다운 선택을 담아냈다. 자신의 굴레를 벗어내려 했던 남자 김우진 역을 맡은 배우 정문성을 만났다.

빨간 장미 차와 함께 한 이번 인터뷰는 우진과 심덕이 상대를 꼭 껴안고 뛰어내린 그 순간을 보다 뜨겁게 생각하게 만든 시간이었다.

■ “김우진의 정당한 ‘절실함’을 담아내고 싶다”

-몸이 안 좋다고 하던데 괜찮아졌는지?
“감기에 걸렸었는데 좋아지고 있어요. 다른 건 괜찮아졌는데, 계속 연습하고 공연도 하고 있으니 목이 안 돌아오네요.”

-<글루미데이> 작품으로 제안이 왔나? 선택의 여지없이 우진 역으로 제안이 온 건가?
“처음엔 작품으로 제안이 왔어요. 캐스팅 초반엔 여러 역할로 열어 두고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드라마 일정이 걸린 게 있어서 답을 마지막에 드렸어요. 그때 다른 구성원들을 확정시키면서 성종완 연출님이 절 우진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저 역시도 대본을 읽고 우진 역할이 더 하고 싶었던 점도 있고요.”

-남자 배우라면 사내 역이 더 탐이 났을 것도 같다. 사내 역을 하고 싶진 않았나
“우선, 김우진이란 실제 존재했던 인물을 연기한다는 게 어려울 것 같았어요.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한 글이나 책 등 관련 자료가 굉장히 많고, 그런 인물을 배우가 연기한다는 게 어느 정도의 제약이 있을거란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 상황 안에서 제가 어떤 걸 표현해 낼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끌렸어요.

처음 사내란 인물을 보고, 배우가 이런 식으로 하면 바로 ‘멋있겠다. 무섭겠다. 재미있겠다’ 이런 게 떠올랐어요. 그런데 김우진은 굉장히 많이 등장하는데 ‘빡’ 이런 게 없어요. 강렬한 뭔가가 없는 캐릭터는 배우 입장에선 어렵긴해요. 그런데 전 어려운 게 재미있어요. 우진이란 이 역할에 대해서도 어느 순간 재미를 주고 싶어요. 내가 공포에 떨고 있는 모습에서 어느 순간 무섭다는 걸 느끼게 하고 싶고, 진짜 나약한 모습에서 사람들이 멋있다고 느끼게 하고 싶기도 해요.”

-대본이 오면 어떻게 캐릭터를 만들어나가는 편인가?
“캐릭터를 잡는 것 보다 상황을 해결하는 걸 우선적으로 생각해요. 어떤 상황마다 대사가 써 있는데, 과연 이 상황에서 인물들은 어떤 감정이길래 이런 감정을 받을 수 있을까? 그 점을 먼저 해결한 다음에 이 사람들의 관계를 해결해요. 그 뒤에 제가 맡게 될 인물의 캐릭터에 대해 생각해요. 저랑 김우진이란 캐릭터가 적절히 섞여있는 캐릭터를 만드는 거죠.”

-본인과 캐릭터가 섞여있다는 말은 본인에게서 뭔가를 끌어낸다는 말인가
“‘내가 그 사람이다’고 상상했을 때, 이런 관계였을 거다. 이런 사람이었을 거다는 걸 그린다는 의미예요. 그 전엔 캐릭터로만 봐요. 김우진이란 사람이 왜 이 말을 했을까? 우진과 주변 사람들의 관계가 이해되면 ‘그래. 이런 말을 뱉을 수 있겠어’, ‘그래 과연 나라면 어떻게 말을 할까’를 생각하게 돼요. 배우가 100명이라면 다 다를 수 있겠죠. 그 때 배우는 자기 자신을 설득시키는 말, 그런 뉘앙스로 접근해가겠죠. 연출님이 굉장히 열린 분이라 디렉션과 완전 반대의 연기를 하는 경우에도 납득이 되면 ‘이럴 수도 있다’는 코멘트를 해 주세요. 여러 각도로 열린 분이세요. 아마 9명 배우들이 선보이는 3가지의 캐릭터들이 다 다를 거라고 봐요. 연습할 때도 이렇게 다른 거 보면, 공연이 진행되는 걸 보면 엄청나게 다르지 않을까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나쁜자석>도 마찬가지고 많은 작품들이 그렇다고 생각해요.”

-초연 때 성 연출은 ‘<글루미데이>는 삶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라고 말 한 적 있다. 정문성 배우는 이 작품이 어떤 작품인 것 같나?
“저는 그렇게 한 문장으로 정의 내리진 못하겠어요. 사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제가 맡은 김우진이란 사람을 봤을 때 약한 면이 많이 보여요. 인간이 조금 그렇잖아요. 강한 척 힘을 쓰는 사람이든, 굉장히 공부를 많이 한 지식인이든 혹은 백수든 간에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를 압박하는 뭔가가 있을거라고 봐요. 자신 안에서든 외압이든, 그 안에서 나약해지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거죠. 그렇게 싸우는 모습이 어떤 때는 한심하고 애처롭지만 또 어떤 때는 대단해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확실한 건 누구는 고귀하고, 누구는 천하다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거죠. 여기 나온 인물들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누군가는 사랑을 중요시하고, 누군가는 이념을 중요시하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겠죠. 이 사람의 행동이 보기 싫든 뭐가 됐든 간에 그 행동이 저 사람에겐 정당하다 보이도록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 사람의 절실함’ 그런 것이 많이 보였으면 좋겠어요. 저는 나중에 끝날 때 다시 말씀 드릴게요. (프레스콜 때 다시 질문하면 되겠나) 그 때보단 공연 개막 한 달 반 정도 뒤에 말씀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웃음)”

-무대에 직접 올라가야 들어오는 게 많은 편인가
“완전히 제 목소리가 됐을 때 열리는 게 많아요. <나쁜 자석>도 지난 초연 때 제가 보여 준 것과 달랐을 거라 봐요. 이게 핑계일 수도 있는데, 전 그 공간에서 관객을 만났을 때, 주는 공기가 분명 있다고 봐요. 그 공간에 오랜 시간 살고 있었을 때, 다가오는 것도 또 다르겠죠. 이 커피숍도 처음 와서 아직은 보이는 게 없는데, 이틀에 한번씩, 한 달 두 달 계속적으로 오다보면 여기에 뭐가 있는지 다 알겠죠. 또 어디에 앉으면 어떤 기분이 들지 알게 되는 것 그런 거죠.”



■ 굿 파트너에서 양의 탈을 쓴 늑대로 변신한 사내에 대한 공포

-<나쁜자석> 인터뷰 땐 꼼꼼하게 자료를 찾아보는 배우는 아니라고 했다. 실존인물 김우진 역을 준비하면서는 조금 달랐을 것 같다.
“1897년 전라남도 장성 출생, 이렇게 몇 년 어디 출생과 같은 바꿀 수 없는 사실 혹은 어디로 넘어가서 이런 걸 했다는 식의 정보는 다 공부하죠. 그런데 ‘이 사람은 이러 이러한 사람이었다’는 식으로 구체적으로 표현해 놓은 정보는 지금의 저한테는 득이 되지 않을거라 생각해요. ‘이 사람은 이래서 그런거다’는 식의 결론을 내면 거부감이 들어요. ‘정확한 사실여부는 모르는데 그랬다고 하더라’ 이런 식의 이야기가 더 도움이 돼요. 거짓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럴 수도 있었던 사실 그게 배우에겐 더 좋은거잖아요.

김우진에 대한 평도 다 달라요. 누군가는 굉장히 멋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이는 ‘지 마누라도 있으면서 윤심덕과 바람을 핀 쓰레기’라고 평할 수도 있겠죠. 김우진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김우진으로서 정답을 이야기하겠죠. 그게 거짓말이라고 해도 전 그 사람처럼 흉내 내지 못할 건 분명하죠.

연습실에서 (이)규형이가 관련 책을 읽고 있으면, 전 옆에서 ‘윤심덕과 우진이가 뭐라고 했대’ 이렇게 물어봐요. 그럼 (사내 역)규형이가 ‘아직 안 나왔는데’라고 답해요. 그러면 전 ‘나오면 말해줘’라고 해요. 그러면 나오는 장면 한줄 문장을 보여줘요.(웃음) 제가 어떻게 하든 ‘진짜 김우진이 살아 돌아온 것 같아’ 이런 말은 들을 수 없겠죠. 대신 ‘김우진이 어떻게 저럴 수 있어’ 그런 말은 안 들어야죠. 최소한의 그런 공부는 필요했어요. 그렇다고 관련 정보만 따르려고 하다보면, 껍데기를 입으려고 하는 모양새가 될 수 있어서 경계했어요. 배우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먼저 해 본 뒤에 실존 인물에 대한 정보를 접하게 되면 내 안에 다른 뭔가를 끄집어 낼 수 있지 않을까요.”

-같이 출연하는 다른 배우들(김경수 임병근, 곽선영 안유진 임강희, 이규형 정민 신성민)은 관련 책들을 많이 찾아보는 편인가
“공부를 많이 하겠죠. (임)병근이는 이미 다 외웠던데요. 저만 문제예요. 제가 아프기도 했었고, 다른 공연도 하고 있느라 이것저것 많이 참석을 못했어요. 다들 잘 하고 있으니까 형인 저만 잘 하면 되는데...팀 안에선 (안)유진 누나 빼고 제가 형이에요.”

-미스터리의 중심에 있는 사내와 우진은 굿 파트너의 관계로 시작한다.
“우진과 사내는 처음엔 굉장히 뜻이 맞는 반가운 친구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는 사내의 비상한 머리를 보면서 멋있다는 생각, 외향적으로 추진력을 발휘하는 모습에서는 부러움과 질투심을 보였을 것 같아요. 그러다 ‘나는 왜 저러지 못할까?’ 스스로를 한심하게 생각했겠죠. 그런 와중에 사내란 존재가 너무나 소름이 끼칠 정도로 사람을 질리게 하는 몇몇 장면이 들어오게 돼요. 그 사건들을 계기로 저는 이 사람을 공포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해요. 그 뒤로 한참을 보지 않았지만 사내는 계속적으로 우진의 주변을 맴돌면서 상황을 안 좋게 만들기도 하는 존재입니다.”

-사내는 어떤 공포의 대상인가?
“김우진이 실제 정신쇠약에 걸려 약에 의지해서 살았다고 들었어요. 점점 현실과 혼동이 오기 시작했을거라 봤어요. 사내가 다른 사람에게는 인간인데 저는 믿지 않아요. 일종의 양의 탈을 쓴 늑대란 생각도 들어요. 분명 나를 어떻게 하려고 왔다고 봤어요. 실존하는 인물과 싸우는데, 내가 상대할 수 없는 커다란 사람일 수 있겠죠. 일단 지금 가지고 가는 건 이건데 나중에 어떻게 될진 모르겠어요. 이 사람이 인간일지라도 결국 후반부 내 눈엔 인간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어요.”

-사내는 ‘사의 찬미’란 희곡을 통해 김우진과 윤심덕을 조종하려고 한다.
“우진은 그런 면이 있지만, 심덕은 조정당하는 인물로 비춰지진 않아요. 단적으로 극 마지막에 사내가 심덕을 설득해서 자기가 원하는 결말로 끌고 가려고 하는데 결국 선택하는 건 심덕입니다. 두 가지의 결말을 놓고 마침표를 찍는 건 심덕인거죠. 그렇기 때문에 심덕이 조정을 당했다고 하긴 힘들어요.

우리가 비하인드 스토리로 정해놓고 가는 것 중 하나가 심덕이 우진과 만나지 못하고, 여러 가지 주변 상황으로 힘들어할 때, 우진이 굉장히 힘이 되는 글을 써서 심덕에게 보냈다는 겁니다. 하지만 중간에 사내가 가로채서 적당히 수정한 글을 심덕에게 전달해요. 사내의 속셈은 심덕이 우진에게 버려진 듯 굉장히 외로워하면서 비관하게 만들려는 거죠. 하지만 윤심덕은 우진을 끝내 만나야겠다고 생각해요. 결국 우진은 사내 앞에서 많이 무너졌지만, 심덕은 우진에 비해 멘탈이 강했던거죠.”



■ 우진과 심덕이 꼭 껴안고 뛰어내린 짧지만 가장 행복했던 ‘그 순간’

-우진과 심덕은 배 위에서 몸을 던진다.
“우진은 저 사내의 결말을 뒤집어 사내가 뜻하는 대로 하지 않아요. 두 남녀의 죽음을 비극으로 보고 슬프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그 이후의 행방에 대해서 궁금증을 내보이기도 하는데 전 꼭 껴안고 뛰어내린 그 잠깐의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심덕 같은 경우에는 우진의 마음을 확인하지 못한 채 관계를 끌고 왔는데, 이 사람이 다 버리고 나랑 죽겠다고 해요. 그렇게 되면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감정을 받고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두 사람에게 주어진 상황에선 가장 행복한 결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연출님의 감성을 깨뜨리고 싶지 않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요.”

-정문성 배우는 연출의 감성과 다른 면이 많나
“닮은 점도 많아요. 저도 두 남녀가 어딘가에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해요. 그런데 이태리로 도망가서 지지고 볶고 사는 그 만큼, 그 뛰어내린 몇 초 동안 굉장히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의지 했을거라 생각해요. 죽든 살든 단 몇 초라도 내가 이 사람에게 전적으로 몸을 맡긴다는 게 어렵잖아요. 현실에선 그렇게 살기 힘들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그렇게 해요. 그것도 멋있는 거 아닌가요?

연출님과 저랑 비슷한 점은 항상 앞에 뭔가를 그리듯이 쳐다보고 설명을 해요. 저도 뭔가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림을 그려요. 우선은 그게 먼저죠. 우리 둘이 마치 여기 있는 사람한테 이야기하는 것처럼 설명을 해요. 상상을 하면서 그려본다는 거죠. 연출님도 배우를 하셔서 그렇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어요. 그래서 더 넓게 열어 줄 수도 있는 것이고, 희미하게나마 그림을 그렸다 지웠다하면서 생각을 열어나가요.”

-‘죽든 살든 단 몇 초라도 상대에게 전적으로 몸을 맡기는 그런 사랑’을 하길 원하나?
“그런 사랑을 하기가 굉장히 힘든 건 맞아요. 하지만 그게 중요해요. 확 열정적으로 사랑 할 수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잖아요. 개인적으로도 그러고 싶어하는 것도 맞고요. 꼭 그런 사람이랑 결혼 하고 싶어요. 서로가 그런 열정이 맞아야 가능 하겠죠. 나에게 감정도 없는 데 열정적으로 사랑은 못할 것 같아요. 제가 동화에 나오는 사람은 못 돼서(웃음)”

-사내는 심덕의 탐미주의에 이끌린다. 우진 역시 심덕에게 이끌린다. 우진은 이폴리타 같은 심덕에게 삶의 열망을 느끼게 되는가, 아님 다른 어떤 이유인가
“윤심덕은 어떻게 저렇게 행동하지 싶을까? 그 정도로 굉장히 자유로운 사람으로 나와요. 그런데 나는 굉장히 틀에 갇혀 있는 삶을 살았으니 달라보였겠죠. 자신의 열망은 커져가는데 삶은 점점 좁아지니까 숨막혔겠죠. 이렇게 자신과 달리 넓게 나갈 수 있고, 밖으로 뱉어내는 사람을 봤을 때 너무 매력 있을 수 있죠. 그럴 수 있어요.”

-우진과 사내의 다른 점은 온도라는 대사가 있다. 작품 안에서 어떤 의미가 있나
“사내가 몸이 찬가? 사내는 인간이 아닌가? 하하. 사실 제가 몸이 따뜻해요. 표면적으론 이 사람이 더 따뜻하고 사내는 차가울 수 있는데...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어쨌듯 심덕은 내가 입을 맞췄을 때.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거나, 최소한 나랑 키스할 때 떨고 있는 그걸 느껴서 마음이 따뜻하다고 느끼지 않았을까요? 반면 사내가 키스했을 때는 욕정으로 오해할 수도 있어요. 사내는 진짜였을지도 모르지만요. 사내 입장에선 이 여자를 빼앗아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에 온전히 떨리는 키스를 할 수 없었겠죠. 그래서 심덕이 받아들였을 땐 마음이 따뜻하지 않아 키스가 차갑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이건 온전히 제 생각입니다. 심덕에게 물어봐야 할 질문인 것 같은데, 심덕 배우들(곽선영 안유진 임강희)에게 물어보세요.”

-김우진은 운명론자다.
“우진이 운명론자? 그런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본인은 정해진 길로 밖에 갈 수 없는 사람으로 여겨 질 때, 그것도 대가리가 커지기 전에 알게 되면,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을 했겠죠. 길이 정해져 있다 는 생각만으로도 힘든데, 사내를 만나고 이야기하면서 자기 뜻대로 되지 않고 휘둘리고 있다 느끼게 돼요. 우진은 그게 운명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운명을 바꾸고 싶어해요. 운명을 믿었으니까, 오히려 그걸 거슬러서 운명을 바꾸려고 해요. 이겨내면 지금껏 억압받았던 내 삶을 어느 정도 보상 받은 느낌도 받을 수 있으니까요.”



■ “도대체 프레이저는 어떻게 하면 구원 받을 수 있을까?”

-<나쁜자석>의 프레이저와 <글루미데이>의 김우진은 둘 다 우울한 기운이 있다.
“대단한 집안의 아들로서 억압과 구속을 받았던 건 같은데, 두 인물의 개인적 성향이 완전 달라요. 뭔가 상황도 다르지만요. 우진은 괴로워하며 묵묵히 그 상황에서 살았다면, 프레이저는 그렇지 않은 척 살았던 거죠. 우진은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면, 프레이저는 어찌할 방법이 없어서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죠. 비슷하게 태어나서 굉장히 다르게 살아간 사람들이죠.”

-평면적으로 보면 우진은 그저 나약한 지식인으로만 비춰질 수 있다.
“그냥 안타까운 사랑, 지식인들이 나약해서 죽는구나 이런 식으로 보이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게 한쪽으로 쉽게 가버리는 게 아닌 누가 봐도 이해가 되는... 그런 쪽으로 연기를 하고 싶어요. 관객들이 ‘불쌍한 놈’ 이런 반응이 아니라 ‘저거 뭔지 알겠다. 그렇지 이해가 된다. 저럴 수 밖에 없지’ 란 생각이 들게 더 노력해야죠.”

-이전에 시간이 촉박해 질문하지 못한 게 있다. <나쁜자석>에서 고든이 남기고 간 편지에는 어떤 내용이 적혀있다고 생각했나
“저번 시즌엔 연습 시간에 장현덕(장승조)이가 진짜로 고든이 돼서 쓴 유서를 받았고, 이번 시즌엔 마지막 리허설 때 (김)재범이 형이 써준 걸 받았어요. 재범이 형은 자길 기억해달라는 이야기를 했고, 현덕이 같은 경우는 내용이 비슷하긴 한데 굉장히 길게 썼어요. 같은 말을 계속 쓴 것도 아니고요. 전 그 편지를 보자마자 울었어요. 내용도 내용인데, 굉장히 고민 하면서 이렇게 썼다는 게 느껴졌거든요. 죽기 전에 썼다는 점도 그렇고 막 울었어요. (송용진 고든의 편지는 받지 못했나)용진 형 고든 편지는 못 받았어요.

그런데 그때 프레이저에게 중요했던 건 내용이 아니었어요. 장례식장에 억지로 끌려와서 ‘너희들에게 남긴거다’는 유서를 받고 저는 뛰쳐나와, 용바위 언덕으로 올라가요. 거기서 전 유서가 있음에도 고든의 죽음을 부정해요. 이렇게 애가 죽으면 내가 너무 미안하고,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는거고, 이 애의 편지에 적힌 말들이 날 슬프게 한 게 아니라 내가 이 아일 죽였다는 사실이죠. 유서도 없었으면 ‘안 죽었어’ 하고 말았을텐데, 아니니까 이젠 제가 죽으면 안 되는거죠. 내가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으니까요. 29살엔 ‘난 내손으로 못 죽어. 누가 날 밀어서라도 죽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마지막 난장이 되고, 타임 캡술까지 깨고 나면, 내 의지로 죽는 건 그것조차 이기적이고 나쁜 짓이란 생각이 들어 누가 나 좀 죽여 줘. 도대체 어떻게 하면 구원 받을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어요.

첫 시즌 때는 그럴 용기도 없고 무서우면서 나도 언덕 아래로 뛰어내리려고 했어요. 앨런이 용바위 언덕 뒤에서 장난으로 밀었을 때 ‘죽을 뻔 했잖아’란 대사에도 그런 의미가 있는거죠. 나도 떨어져서 죽어야 하는 게 맞는데 그걸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누가 밀어 화가 난 거죠. 이번 시즌엔 의미가 달라졌죠. 고든의 시체를 보면 죽을 수도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는 건, 유서만 보고, 내가 고든을 죽였다는 자책감에 나 편하려고 죽었는데, 만약 고든이 안 죽었으면 어떻게 되는 거죠. 하늘 올라가서 고든이 없으면?... 살았든 죽었든 고든을 봐야 한다는 거죠.”

-프레이저와 우진 역을 함께 해야 해서 힘들 것 같다.
“힘들긴 한데 우진에겐 아직 100%는 못 빠져 있는 것 같아요. <나쁜자석>할 땐 뭐든 섞고 싶지 않았는데 여건이 그렇지 않네요. 우진이란 캐릭터도 굉장히 매력 있어서 잘 하고 싶어요. 다행인 건 다름 사람보다 첫 공이 일주일 뒤 라는 점이요. <나쁜자석> 끝나고 4일 정도는 온전히 우진에게 투자할 수 있어요. 그 전에 어떻게든 해 놓고 확 탄력을 줘서 만들어야죠. 그러면 정말 좋겠어요.”

-10년 혹은 20년 뒤에 연극 <나쁜자석> 연출제의가 들어온다면?
“할 수는 있겠죠. 그때의 대중들이나 젊은이들의 감성을 읽을 수 있다면 할 수 있는데, 아니라면 못 할 것 같아요. 굉장히 올드한 작품으로 만들고 싶진 않거든요.”

■ “연기에서 제일 중요한 건 상식”

-좀 더 나이가 들어 연출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나?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대학교 다닐 때 차범석 선생님의 <산불> 연출을 해 본 적이 있긴 해요. 당시 과대표였는데 그래서 절 시킨 것 같아요. 연출하면서 큰 도움이 됐던 점 하나는 규복이란 내 캐릭터 말고 다른 캐릭터에 대해서 생각 할 수 있게 된 점이요. <산불>이란 작품이 여자 캐릭터가 많이 나오는데, 제가 여자 흉내를 내며 시연을 했어요. 배우들에게 설명을 해줘야 하니까요. 그때가 대학교 2학년 때였는데, 그 전엔 다른 역에 대해 별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연출 경험을 하면서 저 인물은 저런 이유 때문에 울고, 저 이유 때문에 저렇게 말 하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 이유를 알고 나니 연기를 하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다르게 다가왔어요. 제가 극 안에서 그 사람을 대하는 것도 달라지게 됐어요.

또 기억나는 일화로는 무대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집 두 채를 만들어 내라는 교수님 지시가 떨어졌어요. 방법을 모르니 무작정 하다보니, 손이 다 까져서 주먹도 못 쥘 정도로 힘들게 작업했어요. 무대, 조명, 음향, 의상 까지 체크하면서 연출로서 스트레스가 대단했어요. 그래서 난 연기를 해야겠구나란 생각도 들었어요. 대신 그 때의 경험이 배우의 눈을 넓게 만들어 줬어요. 조명 하나, 새소리 하나, 후질근한 옷도 다 의미가 있는 거였어요. 이걸 다 인정하면서 연기를 하니 많은 도움이 되더라고요.“

-순천향대학교 연극영화과를 나왔다. 배우가 무대 위에 서 있고, 걸어가고, 대화하고 이런 기본적인 것은 강의 시간에 배우지 않나
“분명 배웠겠죠. 그걸 잘 듣는 애는 그 부분을 잘 할 수 있었겠죠. 신체 훈련 수업을 잘 듣는 이는 무대에서 잘 걸어다닐거고, 화술 수업을 잘 들었던 이는 말을 잘 하겠죠. 이론 수업을 잘 들었던 이는 무대 위에서 못 걷고 말은 잘 못 해도 공연에 대한 이해는 빠르겠죠. 이게 꼭 연극과만이 아닌 우리가 고등학교 때 여러 수업을 듣지만 다 백점 맞지는 못하는 것과 똑같다고 봐요.

게다가 배우는 누가 아무리 이야기 해줘도 몰라요. 진짜 자기가 느껴야 자기 것이 되요. 이론을 가지고 남들이랑 싸우는 사람이라면 더 많이 듣고 보면서 그 이론에 내 이론을 덧붙여 만드는 과정을 거치면 되겠죠. 배우 역시 이론 공부를 많이 하면 더 머리를 키울 수 있을지 몰라도 ‘닭살이 돋을 정도로 이런 거구나 ’란 확실한 경험을 하기 전엔 자기 것이 되기 힘들어요. 동물처럼 무대 위에 던져져서 2시간 동안 경험하는 그것 역시 확실한 경험이죠.”

-정문성 배우의 분석력을 보면서 객관적으로 작품을 보는 연출적인 시각도 많이 감지됐다.
“연출적인 시각이라기 보다는 오래전부터 ‘연기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뭘까?’에 대한 고민입니다. 그 때 내린 결론은 ‘상식’이었어요. 상식에서 벗어난 이야기는 최소 포텐이 터질 수 있을지는 몰라도 위험하고 거의 대부분 틀린 연기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요.

예를 들어, ‘여기서 걸어와서 마시고 나가’란 지시가 떨어졌어요. 그런데 ‘상식’을 생각하지 않고 무대에 서게 되면, 그냥 걸어와서 물을 마시고 나가요. 반면 ‘상식’적인 시각에서 접근하게 되면 달라지죠. ‘너 왜 여기 걸어 들어왔어? 물을 왜 마셔? 이걸 서서 마셔? 왜 바로 나가?’ 이렇게 상식적으로 질문을 하게 돼요. 조금씩 상식적으로 한마디 한마디의 의미를 이해하고 걷고 행동하게 된다는거죠. 내가 내 연기를 보지는 못하지만 최소 몰상식한 연기는 보여주지 않게 돼요. 그렇게 해야 배우로서 내 의미가 온전히 전달되고 나 스스로 자극이 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게 된다고 봐요.”

-바쁘게 계속 활동 중이다. 추후 일정은?
“이름을 밝힐 순 없지만 또 다른 작품을 하게 됐어요. 이렇게 딱딱 아귀가 잘 맞아 떨어진 적이 없다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 잘 맞는 스케줄이네요. 이전 공연들과 이틀씩 밖에 안 겹쳐 계속 연결해서 하게 됐어요. <글루미데이> 첫 공 올리고 3일 후에 새 작품 연습을 시작하게 돼요. (가정을 책임져야 할 유부남도 아닌데 조금 더 쉬엄쉬엄하면 안 되나?)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데 제가 저희 집 가장이죠. 새로운 작품 하기 전 일주일이라도 쉬고 싶은데, 현실은 다음 공연을 하면서 연습을 하고 있겠죠. 조금 슬프네요.”

-마지막 질문이다. <글루미데이>는 어떤 기분을 주는 작품인가
“혹시 배 타보셨어요? 엄청 추운 계절인데다 진짜 깜깜한 밤에 흔들리는 작은 배를 타봤는데, 파도가 ‘착’ 내 살에 와서 닿았어요. 그 때의 확 무서운 기분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는데 <글루미데이>가 그런 기분이 들게 해요.

그 때가 어렸을 때였는데, 어린 마음에도 ‘이 배가 뒤집히거나, 여기서 나 혼자 튕겨나가 빠지든 죽을 수밖에 없겠구나’ 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 와중에 무섭다는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어요. 그냥 다들 배 난간을 붙잡고 버티고 갔어요. 날씨가 좋지 않아 바다에서 파도가 찰싹 찰싹 칠 때마다 몸이 딱 얼어붙는 것처럼 소름이 끼쳤어요. 그 이미지가 지금 떠올랐어요. 차가운 밤공기 그리고 어두워서 주변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어디선가 와 닿는 차가운 물방울 그런 느낌이요.”

공연전문 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허영옥, 네오]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