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민 하차를 계기로 이것만은 꼭 각성했으면

[엔터미디어=김교석의 어쩌다 네가] <무한도전>의 영향력이 엉뚱한 곳에서 불타올랐다. 새 출연자를 결정하는 일이 대중적 관심사가 된 것은 식스맨 특집이 바라던 의도였다. 예능‘판’ 전체를 대상으로 놓고 시청자들을 깊숙이 끌어들여 <무한도전>의 영향력을 확인하고 다지려던 참이었다. 많은 관심과 시청률 상승은 순항의 지표였다. 그런데 예능 왕좌의 주인을 확인하려던 계획이 절정에 이르기 일보직전, 일기예보에 없던 대형 풍랑이 나타났다.

유력 후보자였던 장동민은 ‘내정설’을 넘어서자마자 또다시 자격검증의 거센 파도를 마주했다. 과거 팟캐스트 방송에서 남긴 부적절한 발언들이 문제였다. 당시에도 논란이 있었지만 특유의 상남자 스타일로 사과하고 해당 방송분을 삭제했다. 하지만 지금은 관심과 인지도의 ‘급’이 달라졌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은 이번 사태로 그 발언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논란이 거세지자 장동민은 <무한도전>과 자신 둘 다 망가지기 전에 자진 하차를 선언했다. 여의도로 비유하자면 청문회를 열기 전 방어불가의 약점이 드러나 자진사퇴한 모양새다. 하지만 불씨는 진화되는 듯하면서 옆으로 번지고 있다. 양상은 늘 그랬든 성별 구도의 대립, 공인의 잣대에 대한 의문제기, 그리고 중요한 사회현안이 수두룩한데 연예 가십에 열을 올린다는 특유의 훈계로 말이다.

그런데, 이번 이슈를 이렇게 다양한 전선으로 끌고 가는 것 자체가 장동민의 발언을 우리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제대로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이자 증거다. 장동민과 유세윤 등이 뼛속 깊이 반사회적인 생각을 갖고 산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다면 사회 구성원으로, 그것도 대중의 사랑을 녹으로 받는 연예인으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이 발언이 문제가 되는 건 그릇된 인식이 녹아든 ‘개그’였기 때문이다. 개그는 하는 사람과 받아들이는 사람의 손뼉이 맞아야 웃음과 의미가 만들어지는 합의의 소산이다. 큰불이 붙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장동민의 개그에 많은 사람들이 하이파이브를 거부했지만 뒤이어 그에 대한 비난의 뜻을 담은 손뼉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유세윤, 유상무와 함께 진행하는 <옹달샘과 꿈꾸는 라디오>(이하 옹꾸라)는 방송과는 플랫폼이 전혀 다른 팟캐스트다. 시청률이나 제작진의 기획, 심의 등의 제약에서 벗어나 팬들만을 위한, 그리고 자신들이 하고픈 개그를 편하게 하는 19금 막장 방송을 표방한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중을 상대로 하는 매체에서 우리 사회에서 금기시되고 비난 받아 마땅한 패륜, 여성 비하 및 혐오성 개그를 하려면 ‘우리끼리’를 넘어선 무언가 사전에 합의나 맥락이 필요했다.

개그는 한끝차이로 유머와 불쾌함으로 갈린다. 미국 코미디 산업의 최상위라 할 수 있는 ‘SNL’과 그 출신 배우 겸 작가들의 작품들, <빅뱅이론> 등의 시트콤, 세스 로건, 조나 힐, 마이클 세라 등이 주로 등장하는 주드 애파토우 사단의 할리우드 코미디 영화들은 기본적으로 백인 남자 입장에서 인종차별, 여성, 게이, 너드에 대한 비하가 주요 개그 코드다. 하지만 이것이 유머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평균 이하의 인기 없는 남자들의 성장과 같은 따스한 정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종차별과 성소수자들을 거리낌 없이 비하하는 미국식 개그가 가능한 또 다른 이유는 오랜 시간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고민해오고 현재진행중인 무거운 문제들의 현실 비틀기이기 때문이다. 즉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체화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힙합이 백인들에 의해 코미디로 패러디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장동민의 이번 발언은 유머가 없는 실패한 개그다. 정서적인 바탕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그로 해석할 만한 맥락도 없다. 자극적이고 센 캐릭터를 살리려다가 반사회적 막말만 덩그렇게 남겼다. 장동민은 웃자고 한 말이겠지만 개그로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은 장동민은 원래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며 실망하게 된다. 지금의 들끓는 비난 여론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장동민을 더 이상 좋아할 수 없다는 의사 표현인 셈이다.



그러니 당연히 남녀 구도로 볼 일이 아니다. 정치나 사회현안을 두고 연예계 가십에 빠져 있다고 비판할 일도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비판은 이런 비판을 하는 사람들이 혐오하는 물타기와 매커니즘이 같다. 장동민에게 분개하는 것과 세월호를 추모하고 성완종 게이트를 예의주시하는 건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주류에 녹아 있는 그릇된 도덕적 가치관이나 여성관도 정치사안 못지않게 중요한 사회적 문제다. 비슷하게 이야기하자면 연예인 문제에 정력을 쏟는 게 어리석다는 사람들은 장동민 발언에 숨어 있는 위험성과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것으로 단정하고 그릇된 여성관을 가졌거나 여성 혐오자라고 결론짓는 것과 동렬의 행위다.

얼마 전 30~40대 여성의 전폭적 지지를 누리는 유희열이 콘서트에서 성희롱에 가까운 농담을 해서 문제가 됐다. 그 당시에도 콘서트 분위기 좋았다면서 문제가 안 된다는 의견이 있었다. 여기서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만약 여자 친구가 있다고 치고, 그녀가 그 콘서트장에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팬들이니 받아줄 수 있다는 건 백번 양보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남자친구나 제3자의 입장에서 그 발언은 여전히 불쾌하다. 콘서트장의 환호가 삐뚤어진 남성중심의 여성관을 덮을 수는 없다. 장동민도 마찬가지다. 팟캐스트에서 했든 공중파 방송에서 했든 그릇된 인식이 비어져 나온 개그에 책임을 져야 한다. 거창하게 공인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대중의 관심과 사랑 위에 서는 연예인이기 때문에 말이다.

또 한 번의 가정이 필요하겠다. 정말 만약 이 칼럼을 꾸준히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면, <무도> 식스맨으로 장동민을 추천하는 글을 봤을 것이다. 취향에도 맞는 데다 예능 대권 후보 중 한 명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캐릭터를 높게 산다. 하지만 도저히 웃을 수 없는 개그를 날렸고 그 결과 박수 대신 냉담한 눈빛을 보낸다. 세고 자극적인 개그, 화통하고 직설적인 브레이크가 없는 개그는 통쾌하고 아슬아슬한 스릴이 있다. 하지만 그 밑에 끄덕일만한 정서와 현실을 비틀어내는 유머가 없으면 들어주기 힘든 막말일 뿐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장동민뿐 아니라 예능 방송 전반에 깔린 남성중심의 여성관에 대한 각성이 요구된다. 요즘 예능은 신선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이 쏟아지며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런 외연적 발전에 발맞춰 오랫동안 한군데 머물러온 남성중심의 여성관도 한 단계 더 성숙해져야 할 것이다.

칼럼니스트 김교석 mcwivern@naver.com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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