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상 ‘화정’의 중심에 선 김여진의 묵직한 존재감

[엔터미디어=이만수 기자] MBC 월화드라마 <화정>에는 김개시(김여진)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가상인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역사에 기록된 실존인물이다. 기록에는 광해군의 총애를 받은 상궁이었고 북파의 영수 이이첨과 쌍벽을 이룰 정도의 권력을 휘둘렀다고 한다. 그녀는 광해군 시절 권세를 누리다 인조반정이 일어나 반정군에 의해 참수당한 인물이다.

<화정>은 광해군(차승원)과 인목대비(신은정)의 대결구도로 세워져 있지만 그 이면에 있는 김개시의 존재감이 사실상 드라마의 핵심적인 힘을 만들어낸다. 알고 보면 <화정>의 시작은 김개시가 선조(박영규)를 독살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선조의 사망으로 광해군이 권좌에 오르게 되면서 본격적인 궐내의 파란이 시작되는 것.

의인왕후의 능에 저주의 물건을 묻어둠으로써 인목대비와 그 외척들 그리고 영창대군(전진서)을 역모의 누명을 씌우는 인물 또한 이이첨(정웅인)과 손을 잡은 김개시로 나온다. 그녀는 그 저주의 물건을 묻은 나인에게 독이 든 따뜻한 청주 한 잔을 권하며 ‘쓰임새’에 대해 말한다.

어린 시절 아비의 노름빚에 팔려 궁궐에 들어온 김개시는 쓸모없는 나인 중 하나로 지내온다. 그러던 어느 날 서책을 찾는 광해에게 시경과 서경의 구절을 혼동한 것을 지적함으로써 주목을 받는다. 개똥이의 한자식 표현인 ‘개시’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에게 광해가 “세상이 틀렸구나. 너처럼 귀한 아이를 그리 하찮은 이름으로 부르다니..”라고 말해줬을 때 그녀는 자신의 ‘쓰임새’의 가치를 깨닫는다.

“서러워 말거라. 누구에게도 생이란 본시 이리 허망한 것일 테니. 허나 살아있는 동안은 누구든 저렇게 타올라야 하는 구나. 나를 태우고 모든 것을 태워서라도.” 김개시의 이 대사는 <화정>이 갖고 있는 조금은 허무주의적인 관점을 담아내고 있다. 결국은 누구나 한 생을 살다 죽을 것이지만 살아있을 때만큼은 활활 타올라야 한다는 것.

김개시라는 인물은 어쩌면 <화정>의 또 한 명의 주인공인지도 모른다. 지금껏 사극들이 다루던 방식은 김개시를 왕을 농락한 요부로 다루는 정도였다. 하지만 <화정>의 시각은 김개시라는 인물 역시 이 당대의 역사를 구성한 한 사람으로 세워두고 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아비조차 닷냥에 팔아넘긴 그런 하찮은 삶. 그 속에서 자신을 불태워 존재가치를 세우려던 그 몸부림으로서 김개시라는 인물을 다시 해석하고 있는 것.

“인간은 모두 욕망하는 존재입니다. 더구나 용상은 욕망의 끝 이제 곧 지난 16년의 시간보다 더한 것을 아시게 되겠지요. 인간의 다짐이란 허망하고 누구도 믿을 수 없단 것을. 왕좌는 뜨거운 불처럼 강하고 아름답지만 전하를 삼킬 수도 있다는 걸요.” 김개시의 이 인상적인 대사는 그래서 <화정>이라는 사극의 중요한 한 축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화정>이 흥미로워질 수 있었던 건 어쩌면 역사의 요부로 기록된 김개시라는 인물을 ‘욕망하는 존재’로서 보편적으로 그려낸 데 있을 것이다. 보면 볼수록 놀라운 쓰임새가 아닐 수 없다.

이만수 기자 leems@entermedia.co.kr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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