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termedia 주요뉴스

‘미생’이 어떻게 성공했는지, 벌써 잊은 것인가
기사입력 :[ 2015-06-13 13:01 ]


누가 대한민국 시청자들의 수준을 폄하하는가


2강. 한국 시청자 정서 [韓國+視聽者+情緖]

[명사]
1.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을 보고 듣는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
2. 안전하고 무난한 선택지를 택할 때 흔히 쓰는 변명.


[엔터미디어=이승한의 TV키워드사전] 하나. 이미 유명한 이야기지만, 윤태호의 <미생>에 눈독을 들였던 건 tvN만이 아니었다. 원작 자체가 힘있는 작품이었으니 탐내는 사람들이 많은 건 당연한 일. 그러나 지상파에서 찾아온 사람들은 협상 테이블에 앉자마자 “러브라인 안 나오면 안 됩니다”라 이야기했다. 웹툰은 웹툰이고, 한국 시청자 정서 상 드라마에 러브라인이 없으면 진득하게 시청하기 어려울 거라 판단했으리라. 가뜩이나 치열하기 짝이 없는 드라마 시장에서 살아 남으려면, 오랜 세월 동안 검증되어 온 흥행요소들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나 윤태호 작가는 이야기가 변질될 것을 걱정해 계약을 꺼렸고, 결국 드라마 판권은 “전형적인 러브라인은 넣지 않겠다”고 약속한 tvN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과를 무척 잘 알고 있다. 드라마 <미생>(2014)은 KBS (1987~1993) 이후 최고로 흥행한 본격 오피스 드라마가 되어 ‘장그래 신드롬’을 불러 일으켰고 나아가 2015년 백상예술대상을 휩쓸었다.

둘. 기획 단계까지만 해도 KBS <프로듀사>(2015)는 무척 신선한 시도였다. MBC <소울메이트>(2006)나 <반짝반짝 빛나는>(2011)의 노도철 PD처럼, 예능 출신 PD가 드라마를 연출하는 전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말 프라임타임 예능의 책임 프로듀서까지 역임했던 서수민 PD가 드라마를 연출한다는 건 분명 전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었다. 인터넷 판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2010)와 MBC every1판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2012)로 NBC <오피스>(2005~2013. 미국) 풍의 페이크 다큐 코미디에 일가견이 있음을 증명해 보인 영화감독 윤성호를 공동 연출로 기용한 것도 화제였다.



여기에 예능 작가 출신의 히트제조기 박지은 작가까지 힘을 합쳐 KBS를 무대로 PD들의 애환을 그린다니, 한국판 <30락>(2006~2013. 미국 NBC)이 나오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부터 KBS가 어쩐 일로 파격적인 시도를 하느냐는 경탄까지, 올 상반기 <프로듀사>는 방송가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딱 좋은 작품이었다. 연출자가 바뀌기 전까지는.

첫 방송 방영 직전, 윤성호 감독이 연출에서 구성으로 보직을 변경함과 동시에 그 자리를 표민수 PD가 대신하기로 했다는 보도자료가 돌았다. 말은 “구성으로 끝까지 작품에 함께 하기로 했다”고 했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만큼 순진한 사람들은 없었다. 과연 윤성호 감독의 흔적이 남아있는 초반 1~2회는 새로운 시도라는 호평과 낯설고 어색하다는 혹평이 나뉘었지만, 표민수 PD가 참여한 분량이 되자 작품에 대한 의견은 눈에 띄게 안정됐다. 그와 동시에 <프로듀사>는 눈에 띄게 뻔해졌다. “KBS가 미친 척 하고 시도하는 모험”에서, 어느 순간 “방송국에서 PD들이 연예하는 뻔한 로맨틱 코미디”가 된 것이다.

뻔한 로맨틱 코미디가 잘못 됐다는 것은 아니다. 뻔한데도 재미있게 만드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까. 그러나 KBS가 굳이 금-토 드라마 편성이라는 초강수를 던져가며 시도했던 도전이 어느 순간 안전하고 무난한 방향으로 선회한 것은 분명 김이 빠지는 일이다. 설마 KBS가 처음 ‘예능 출신 PD+독립영화 감독+금토 편성’이라는 공식을 그렸을 때, 시청자들이 이 새로운 시도를 조금의 낯섦도 없이 바로 반길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셋. 6명의 고정 출연자들이 실제 프로야구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로 가상의 팀을 구성하고, 실제 선수들이 한 주 동안 올린 성적을 기반으로 가상의 리그를 꾸리는 구단 육성 게임인 KBS <스포츠 이야기 운동화 v 2.0> ‘스포츠 대작전’(2015)은 최근 KBS가 보여준 시도 중 가장 파격적인 모험이었다. 그것도 2TV도 아닌 1TV에서 이렇게 젊은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적잖은 스포츠 팬들이 참신함을 느꼈고, 이는 곧 지상파 심야 스포츠 프로그램으로는 드문 고정 팬 층 확보로 이어졌다. 시청자들에게 데이터로 야구를 보는 재미를 일깨워주는 동시에, 구단주의 성향에 따라 팀 색깔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라니. 고리타분하지 않은 방식으로 정보와 재미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새로운 포맷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러나 매체비평지 <미디어스> 김수정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스포츠 대작전’은 KBS 권순우 편성본부장이 “술자리에서 잡담하는 분위기의 프로그램은 1TV에서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 직후 변변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채널 이미지를 젊게 쇄신하려는 실무진들의 몸부림이, 시청자 정서를 내세운 간부의 편견으로 물거품이 된 것이다.

“1TV에서는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스포츠 프로그램이 되어야 하는데 너무 전문적이더라. 그래서 일반인들이 팔로업(따라가기)이 전혀 안 된다. 우리는 전문채널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인, 스포츠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매료돼서 흥미를 느끼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그래서 이런 쪽으로 좀 정리를 해 달라고 한 것.”(보수성? 몰상식? KBS 스포츠대작전 갑자기 ‘중단’ / <미디어스> 김수정 기자 / 2015년 05월 27일 기사) 편성본부장의 편견은 졸지에 ‘일반인’ 전체의 정서가 되었고, KBS의 새로운 시도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다시 뻔한 보수성으로 회귀하는 꼴을 지켜봐야만 했다.



넷. 2014년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한 들개이빨 작가의 웹툰 <먹는 존재>(2013~ )의 영상화 소식이 들려왔을 때, 원작의 팬들은 환호와 동시에 좌절을 맛봐야 했다. 원작에선 ‘키 작고 뚱뚱하고 소심한 추남’임에도 주인공 유양을 사로잡은 매력남으로 등장하는 ‘박병’이라는 캐릭터를, 실사판에서는 가수 겸 배우 노민우가 연기한다는 소식이 함께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정이 나기까지의 과정은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미생>의 사례에서 했던 말을 변주해서 반복하자면, “웹툰은 웹툰이고 한국 시청자 정서 상 드라마 남자 주인공이 추남이면 진득하게 시청하기 어려울 거라 판단했으리라. 가뜩이나 치열하기 짝이 없는 드라마 시장에서 살아 남으려면, 오랜 세월 동안 검증되어 온 흥행요소들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콘텐츠 제작자들이 안 하던 시도 – 웹툰의 영상화, 독립영화감독의 기용, 파격적인 편성 – 를 하는 이유는, 기존의 방식만으론 더 이상 시청자들을 매료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안 하던 시도엔 늘 시행착오가 따르고, CJ E&M이나 JTBC 또한 트렌드를 주도하면서도 오랜 적자에 시달리는 게 사실이다. 안전하고 무난한 선택으로 회귀하고 싶어하는 심리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시청자 입장에서는 그 선택에 대한 핑계로 ‘한국 시청자 정서’를 논하는 게 불편할 수밖에 없다. 높아진 눈높이는, 이미 러브라인 하나 없이 건조하게 회사생활을 그린 <미생>에 대한 환호로 증명해 보이지 않았나?

칼럼니스트 이승한 tintin@iamtintin.net

[사진=tvN, KBS, 클로버 이앤아이]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Copyright ⓒ 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뒤로가기 인쇄하기 목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