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화가 나는 건 그런 사실들 때문이 아니에요. 왜 그 얘길 나한테 안 했죠? 왜 못 했죠? 미리 씨가 어떻게 살아왔든, 어떤 사람이든, 그게 미리 씨잖아요. 모르겠어요. 왜 자신이 살아온 삶을 부정하고 있는지, 왜 감추려만 하는지, 그럼 난 대체 뭔지. 이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일인지. 너무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노력해요.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원치 않았지만 그렇게 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이 있지 않을까. 진심으로 이해가 가는 건 아니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을 때도 많았지만, 노력해요. 그것보다 견디기 힘든 건 미리 씨가 나를 속였다는 거예요. 미안해요.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어서.”

- MBC <미스 리플리>에서 송유현(박유천)의 한 마디

[엔터미디어=정석희의 그 장면 그 대사] 이야기가 급변하여 장미리(이다해)가 실은 새어머니 이화(최명길)의 친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리고 극적인 삼자대면을 앞둔 지금은 미리를 비난하기 보다는 측은히 여기는 쪽으로 돌아섰지만 미리의 거짓말을 알게 된 송유현(박유천)의 처음 반응은 ‘왜 내게 그 얘길 안했느냐’였다. 왜 지난 과거를 솔직히 털어 놓지 못했느냐, 왜 스스로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냐는 송유현의 다그침을 듣는 순간 문득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라고 말했다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생각났다. 왜 솔직히 말하지 못했는지, 왜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었는지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송유현 본부장은 아마 백날, 천 날이 지나봤자 장미리를 이해할 수 없을 게다. 이해하는 척은 할 수 있고 동정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떳떳치 못한 과거가 있을 리 없고 남부끄러운 잘못은 이날 평생 저질러 보지 않았지 싶은, 재벌 황태자로 살아온 유현이 거짓말로 점철된 미리의 삶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나. 술집 접대부로 청춘을 보냈다는 과거, 친구의 졸업장을 훔쳐 동경대 학력을 조작한 일들, 그리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지만 히라야마(김정태)와 수년간 연인 사이였다는 일들을 어떻게 약혼자에게 솔직히 말할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알고 보면 미리도 본인의 책임이 아닌 과거사들, 이를테면 고아원에서 자라다 일본으로 입양되었고 어머니를 찾아 서울에 왔다는 사실 정도는 애당초 낱낱이 밝혔었다. 아니 그저 밝히는 데에 그친 것이 아니라 어머니에게 버려졌다는 애달픈 지난날은 오히려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에 적극 활용해 오지 않았는가. 실제로 유현은 물론 장명훈(김승우) 대표도 미리의 눈물어린 고백에 안쓰러워하며 보호자 노릇을 자처했었으니까. 심지어 하도 미리에게 휘둘리는 바람에 시청자로부터 ‘호구’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게 된 문희주(강혜정) 역시 ‘너 대신 입양을 가서 죽도록 고생만 했다’는 힐난 때문에 지금껏 미리의 거짓말을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에겐 고아원 출신이란 게 콤플렉스 일 수도 있겠지만 영악한 미리에겐 일종의 무기였던 셈이다. 어쩌면 히라야마 또한 마찬가지의 측은지심으로 지금까지 미리 곁을 떠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일은 유현이 아버지 송 회장(장용)이 저지른 엄청난 잘못, 즉 자신의 욕심을 위해 한 가정을 파괴한 행위에 대해서는 “이해합니다. 그러실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송 회장은 법적으로 혼인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다툼이 있는 사이였다고는 하지만 엄연한 사실혼 관계에 있는 한 여자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재물과 지위를 이용해 취했던 것이다. 어머니를 잃은 손자 유현의 장래를 고려해 아이가 있는 여자와의 결혼은 허락할 수 없다는 선대 회장 부인의 유지를 따르고자, 그래서 미리의 어머니 김정순(최명길)의 신분을 이화라는 이름으로 말끔히 세탁하고자 어린 미리를 철저히 외면했던 것이 아닌가.

송회장과 이화 두 사람은 세상을 속였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 서로를 속이며 지금껏 살아왔다. 그것도 미리처럼 어설프게 속였던 게 아니라 너무나도 완벽히. 미리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던 유현이 본인의 이해타산과 상관이 있는 진정한 리플리 두 사람의 잔인한 행보에는 너그러움을 보였다는 것이 기가 막히다. 송유현, 너는 역시 ‘그들만의 리그’ 소속이었던 거다.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entermedia.co.kr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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