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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녀’ 이솜, 한국 영화에서 여태껏 이런 캐릭터 없었다
기사입력 :[ 2018-03-30 15:32 ]
‘소공녀’, 집 대신 담배·위스키·취향에 맞는 남자를 선택한다는 건

아침마다 옥상에서 담배 한 대 피운다
눈앞에는 거대한 아파트 군단
그 위로 펼쳐져 있는 회색 하늘
아침마다 그 하늘 虛 한잔을 마신다
담담하게, 밍밍하게

-최승자 <하늘 虛 한 잔> 중에서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여행자’와 ‘행려자’는 어떻게 다를까. 영화 <소공녀>의 미소(이솜)는 여행 가방에 세간을 넣고 옛 친구 집을 전전하며, “난 갈 데가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이야.” 라고 말한다. 이것은 정신승리인가, 아닌가.

어쩌면 미소는 시대정신의 구현자인지도 모른다. 2004년의 영화 <마이 제너레이션>에 등장하는 청춘들은 청년실업으로 빈사상태에 내몰린 우울증자의 얼굴을 보여줬다. 반면 영화 <소공녀>의 미소는 극빈의 상태에서도 취향적 자아를 지키려는 오롯한 자존감을 보여준다. 이제 이것저것 하나씩 포기하는 ‘N포 세대’의 단계를 지나, 다 버리고 최소한의 것만 챙겨서 떠돌아다니는 ‘가난뱅이 오타쿠’의 세대가 열렸다.



◆ 집세도 오르고, 담뱃값도 오르고

미소는 가사도우미로 일한다. 일당은 4만 5천원. 대학원에 다니거나 유흥업소에 다니는 또래 여성들의 집에서 청소도 하고 요리도 한다. 대학 때 밴드활동도 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자퇴했다. 그 후 작은 회사를 다니다가, 지금은 ‘가사도우미’를 내 직업으로 생각한다. 미소는 난방도 되지 않는 옥탑에 산다. 방이 추워 애인이랑 섹스도 못할 지경이다. 애인 한솔(안재홍)은 담배, 위스키와 더불어 미소의 ‘최애물’이다. 그런 미소에게 위기가 생겼다. 2015년으로 해가 바뀌면서 담뱃값이 2천원이나 올랐다. 집세도 5만원이나 올려달란다. 머리가 하얗게 세는 것을 막기 위해 약도 먹어야 하는데, 여기서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다른 사람이라면 담배나 위스키를 포기했겠지만, 미소는 집을 포기한다. 물건들을 정리하던 미소는 대학시절 같이 밴드활동을 했던 친구들을 떠올리며, 그들을 찾아가 잠자리를 의탁하기로 마음먹는다.

영화 <소공녀>는 미소가 친구들을 순례하는 흐름을 따라간다. 대기업에 다니면서 더 좋은 곳으로 이직하기 위해 자기 팔에 수액을 꽂아가며 일하는 친구는 예민한 성격 탓에 하룻밤도 재워줄 수 없단다. 또 다른 친구는 미소를 반겼지만, 결혼 후 좁아터진 집에서 시부모와 함께 살며 독박가사에 시달리는 중이다. 얼마 전 결혼한 남자후배는 아내와 헤어진 후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있다. 그는 아파트를 감옥이라 부른다. 월급의 절반이상을 대출금 갚는데 써야 하기 때문이다. 남자선배는 이제 중년이 다 된 나이지만, 아직 부모와 함께 산다. 며느리를 보고 싶은 그의 부모는 미소를 보자 반색을 한다. 선배도 넌지시 묻는다. 결혼하면 집도 가족도 한꺼번에 생기니, 좋지 않겠냐고. 하지만 미소는 분명히 선을 긋는다. 나에게는 남자친구가 있으며,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다고.



◆ 가난한 여자의 사치 - 담배, 위스키, 취향에 맞는 남자.

흔히 여성의 빈곤은 가시화되지 않는다. 여성은 임금, 고용, 상속 등에서 분명한 차별을 당하고 있지만, 남자의 경제력에 의존하는 존재로 여겨지는 탓에 여성 빈곤은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즉 ‘여자는 경제력 있는 남자와 결혼하면 된다’ 는 식의 안일한 인식이 여전히 팽배한 것이다. 그 결과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어렵게 만드는 구조는 개선되지 않으며, 여성들은 취향이 아닌 생계를 위한 결혼에 내몰린다.

미소처럼 주거와 생계가 불안정한 비혼 여성들은 대게 취향보다 안정을 선택한다. 하지만 미소는 집을 가진 선배와의 결혼이 아닌, 가난한 한솔과의 연애를 고집한다. 사실 취향에 맞는 남자와의 사랑은 굉장한 사치이다. 담배, 위스키와 마찬가지로, 실용적이지 않고 몸에도 좋지 않은 선택이다. 성차별이 구조화된 사회에서, 이런 사치는 경제적 독립을 이룬 소수의 여성들이나 누릴 수 있는 특권처럼 보인다. 하지만 미소는 그 사치를 포기하지 않는다.



미소는 영화표를 얻기 위해 헌혈을 해야 하는 상황도 즐겁게 받아들인다. 이는 남자를 경제력의 담지자가 아닌 취향의 공동체로 보기 때문이다. “가난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한솔에게 미소는 “아니야. 거지는 나지”라 말한다. 이는 자신을 남자와 무관한 독립적인 경제 주체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는 뚜렷한 자신만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빚 없이 살기 원하고,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는 한솔과 그러한 신념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솔이 “남들처럼 살고 싶어서” 사우디아라비아에 가겠다고 하자, “배신자”라 말한다.

미소를 고용한 여성은 미소에게 “유니끄하다”고 말한다. 유흥업소에 다니는 그녀는 미소와 매우 다른 남성관을 가지고 있지만, 미소는 그녀를 판단하지 않는다. 임신한 그녀에게 맛있는 것을 해주고, 덕담을 해줄 뿐이다. 그러고 보면 미소는 자신을 호의로 맞아준 집에는 유익한 일을 해주었다. 살림에 소질 없는 친구를 위해 밑반찬을 해주었고, 실의에 빠진 남자후배를 위해 집도 치워주고 밥도 해주며 사람의 온기를 나누어주었다. 미소가 옛 친구들에게 재워달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기꺼이 우정을 베푸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그의 자취방은 언제든지 친구들을 위해 열려있었고, 돈이 급한 친구에게는 선뜻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런 미소에게 어떤 이는 “바람 든 것 같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철부지 같다”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염치가 없다”고 말한다.



영화 <소공녀>에서 가장 감정이 격돌하는 장면은 여자선배와의 대화 장면이다. 부자와 결혼한 여자선배는 “내 취향은 아닌” 넓은 집에서 육아에 몰입하며 살아간다. 그런 선배에게 미소는 “다른 사람 같다”고 말한다. 처음에 선배는 관대했으나, 결국 “염치없다”는 말로 미소의 삶을 재단한다. 이처럼 분위기가 험악해진 데는 남편에게 자신의 대학시절을 들킬까봐 불안해하는 선배의 심리가 크게 작용했다. 즉 자신의 모습으로 살지 못하는 공허한 삶인 것이다. 독박가사에 시달리는 친구와 선배언니의 경제적 상황은 매우 다르지만,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까마득히 잊은 채 산다는 점에서는 같다.



◆ 보헤미안의 윤리

영화 <소공녀>는 미소가 갖지 못한 안정된 직장, 집, 결혼이 어떤 의미인지를 친구들의 예시를 통해 블랙 코미디 적으로 보여준다. 좋은 직장에 다니는 친구는 자신이 과거흡연자라는 사실을 숨긴 채 링거를 맞아가며 일하고, 결혼은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나 자신으로 살 수 없도록 하는 제도이고, 집은 자칫 감옥이 되기 십상인 것이다.

영화는 미소가 순례를 마치고 무언가를 깨닫거나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알던 것을 확인하게 된 미소는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간다. 그는 담배를 ‘에쎄’ 대신 500원이 싼 ‘디스’로 바꾸었다가 다시 ‘에쎄’를 피우고, 위스키가 2천원 인상됐지만 꿋꿋하게 위스키를 마신다. 대신 백발이 되는 것을 막던 약을 끊는다. 오히려 조금이나마 흔들리고 달라지는 것은 친구들이다. 결혼 후 자아를 잊어버린 친구와 선배는 과거 자신을 잠시 돌아보고 회한에 젖는다.



백발이 된 미소와 한강변의 텐트를 보여주는 영화의 결말은 긴 여운을 남긴다. 약을 끊고 백발이 된 것은 미소가 남과 다르게 보임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세상의 잣대로부터 한발 더 초연해진 것이자, 기존의 세상에 편입되겠다는 마음을 접은 것이다. 그리고는 휴대폰이 끊긴다. 이를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어찌됐든 미소가 자신의 가치관을 끝까지 밀고나가 ‘유니끄한’ 자기 세계를 지닌 여성주체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이것이 얼마나 파격적인 결말인지 음미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2003년 영화 <싱글즈>에서 나난(장진영)은 제법 멀쩡해 보이는 남자(김주혁)의 청혼을 “내 인생이 똥인지 된장인지 좀 더 알아봐야 겠다”며 거절하고, 미혼모가 되려는 친구(엄정화)와의 결합을 택하였다. 자아의 성장과 여성간의 연대를 위해 결혼을 유보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쿨 해 보였지만, 지금의 눈으로 보자니 주류적 욕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한갓진 양자택일로 느껴진다.



불과 15년 만에 미소가 처한 상황을 보라. 그는 변변한 직장도 없고 집도 없지만, 결혼이 제법 멀쩡한 놈과의 낭만적 결합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친구들의 사례를 통해 보듯이, 그것은 종속이거나 감금이거나 최소한 자기부정이다. 또한 내 인생이 똥인지 된장인지 정도는 애초에 알고 있다. 그래서 미래를 저당 잡히는 빚도 지지 않고,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는 저축도 하지 않는다. 다만 현재를 살아갈 것이다. 거창하지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것이다. 한솔에게 계속 그림을 그리라고 하는 것은 꿈을 포기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네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라는 뜻이다. 미소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동을 하고, 내가 사랑하는 최소한의 것만 가진 채 살아간다.

미소는 가사도우미이지 ‘하녀’가 아니다. 영화 <하녀>에서 ‘늙은 하녀’와 ‘젊은 하녀’는 미소보다 훨씬 부자였지만, ‘하녀’의 길을 택했다. 비단 고용된 ‘하녀’가 아니더라도 결혼을 통해 부불노동의 ‘하녀’가 되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미소가 가사노동을 하는 자유민일 수 있는 이유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환상을 욕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성실한 그녀는 남편과의 행복한 삶을 위해 집을 샀다가 하우스푸어가 되고 결국 살인마가 되었다. 그러나 <소공녀>의 미소는 집을 버림으로써 아무도 해치지 않고 때때로 돌봄을 나누어주는 그윽하고 스타일리시 한 홈리스가 된다.



<가난뱅이의 역습> <가난뱅이 난장쇼> 등을 쓴 일본의 활동가 마츠모토 하지매, <성난 서울-미래를 잃은 젊은 세대에게 건네는 스무 살의 사회학>을 쓴 아마미야 카린 등과 정신의 끈이 닿아 있는 듯한 미소를 무엇으로 불러야 할까. 가난뱅이 오타쿠, 백발마녀, 보헤미안, 취향의 달인....무엇으로 부르든, 그가 유니끄한 미학적·윤리적 주체임은 부인할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일찍이 본 적 없는, ‘쓸쓸하지만 호방한’ 여성주의적 상상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소공녀>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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