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성애를 이해해주겠다니 고마운 일이긴 한데…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내가 짜증을 내는 부류가 하나 있는데, 그건 퀴어 영화에 출연해놓고 그 경험이 얼마나 불편하고 역겨웠는지 징징거리는 배우들이다. 어려울 수는 있다. 하지만 머리에 총을 들이대고 연기를 강요한 것도 아닌데, 자신의 캐릭터와 관객들을 그렇게 쓰레기 취급을 하면 어떻게 하나. 이건 프로 정신의 문제인 거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어서 예상치 못한 배우로부터 그에 대한 진지한 답변을 들으면 호감도가 상승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 [무릎 팍 도사]에 출연해서 자신이 연기한 두 퀴어 연기에 대해 이야기했던 주진모가 그렇다.

다행히도, 내가 얼마 전에 참석했던 [창피해]와 [REC]의 시사회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 배우들은 모두 성실했고 적극적이었고 자신의 캐릭터를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것이 보였다. 분위기가 참 좋았다.

단지 사소하게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퀴어 캐릭터가 등장하는 로맨스 영화라는 걸 제외하면 전혀 공통점이 없는 작품들인데도 비슷비슷한 말들이 반복된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데" 또는 "사람을 사랑하다보니 하필이면..." 이 두 편만이면 말을 않겠는데, 그게 아니다. 이 표현은 개봉되는 모든 퀴어 영화에 대한 언급에 등장한다. 심지어 배우들이 이야기를 안 하면 기자들이나 관객들이 알아서 말해주는 일까지 있으니까.

이 표현들 자체를 따로 떼어놓고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퀴어 로맨스도 기본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정말 어쩌다보니 사랑한 사람이 동성일 수도 있다. (이 주제로 나와 잠시 트위터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창피해]의 김꽃비가 연기한 강지우는 그런 부류이다. 이 캐릭터는 김효진이 연기하는 윤진우를 사랑하지만 윤지우처럼 분명하게 자신의 성적 지향성을 밝히지 않는다. 내용을 떠나 이것은 잘 먹히는 연기 테크닉일 수도 있다. 연기를 하려면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한 발판이 있어야 하는 거니까. 나중에 버리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모든 퀴어 영화를 여기에 맞추는 건 문제가 있다. [REC]만 해도 누군가를 사랑했는데, 어쩌다보니 그게 동성이었던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온라인 사이트에서 남자 파트너를 찾다가 만났다. 더 복잡한 사연 따위는 없다. 수많은 이성애자들이 그런 식으로 만나 연애하지 않던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그런다고 이야기가 덜 애절해지나.

"사랑하다보니 동성" 표현은 절반 정도 선의에서 출발한다. 이 뒤에는 "당신네 소수 동성애자의 심리를 어떻게든 이해해주겠다"다는 태도가 깔려있다. 뭐, 이해해주겠다니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이 이해의 노력은 종종 정도를 넘어선다.

일단 이들은 동성애 감정을 어떻게든 이성애화하거나 이성애를 중심에 넣는다. [번지 점프를 하다]가 대표적인 예다. 이 영화에서 남자주인공이 남자 제자에게 반하는 건 제자가 전생에 자기 여자친구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딘가에 이성애적 이유를 넣어야 만족을 한다.

엉뚱하고 불필요한 주장도 나온다. [필라델피아]가 개봉되었을 때, 어떤 국내 평론가는 이 영화에 점수를 짜게 주면서 그 이유는 영화가 주인공이 동성애자가 된 이유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그것이 반드시 밝혀야 할 어떤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이 자연스러운 상태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 생각은 그의 이해범위 밖에 있었다.

세상 모든 것들이 자신의 이해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수많은 종교 신자들이 그에 해당된다. 물론 그들도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네 종교를 지탱하는 책들이 우주만물을 설명하는 완전하고 모순되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는 생각한다. 이래놓고서 그들은 과학을 오만하다고 생각한다. 과학이라는 방법론 자체가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며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도구도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태도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도. (의심나면 최근 중성미자 소동을 보라.)

우주는 우리가 모든 걸 이해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지 않다. 세상에는 나의 좁은 이해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있다. 나는 [도가니] 사건의 가해자들이 어떻게 사건 이후에도 그렇게 뻔뻔스러울 수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스티븐 시걸의 팬들이 그에게서 어떤 매력을 보는지 모른다. 나는 광수 사장이 왜 아이돌들에게 뽕짝만 죽어라 주는지 모른다. 왜 나는 최근 실험에서 중성미자가 광속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였는지 모른다. 어떤 것은 악이고, 어떤 것은 취향의 문제이고, 어떤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이들은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들을 하나로 묶는다. 그리고 어느 선에서부터 이는 선악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사랑하다보니 동성"의 논리를 끌어와 저들을 이해하려 했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라도 그들을 받아들여 그들이 타자화되는 걸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그러면서, 자기네들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자기가 성스럽다고 믿는 책의 내용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마녀들과 학자들을 산 채로 불지른 신심깊은 신자들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이야기를 진행시키다보면 이들의 논리는 훨씬 이타적이고 절실한 어떤 것이 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쉬운 길이 있다. 우리가 세상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냥 인정하는 것이다. 모든 것의 존재를 다 인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상대주의로 빠질 테니까. 하지만 이해는 완전히 못하더라도 인정을 할 수 있는 영역은 충분히 가려낼 수 있다. 스티븐 시걸로 돌아가보자. 내가 스티븐 시걸의 팬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의 존재가 부정되지는 않는다. 내가 억지로 온갖 말도 안 되는 논리들을 만들어 그들을 설명하려 한다면 모두에게 귀찮은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냥 공존하면 되지 않을까. 이해는 그 다음에 편할 때 해도 된다. 그건 인정만큼 절실한 게 아니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창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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