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부도의 날’ 통해 본 지배층의 민낯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국가부도의 날>은 재난 영화이자 현대사에 관한 영화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 환란이라 일컬어지는 1997년의 외환위기가 정확히 어떤 재난이었고, 당시 정부와 국민의 대응은 어떠했으며, 이후 대한민국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여준다. 사실 1997년의 외환위기는 과거에 지나간 사건이 아니다. 단지 후유증이 컸다거나 현재 진행형이라는 말도 부족하다. 그보다는 현재 한국사회의 조건을 리셋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즉 현재 한국인들은 정치적으로는 1987체제, 경제적으로는 1997체제에 살고 있는데, 1987년 민주화를 통해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이루었지만, 1997년 외환위기를 통해 만들어진 신자유주의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것이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의 서사는 크게 세 축으로 진행된다. 첫째는 가장 먼저 외환위기를 감지하고 국가경제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 하는 한국은행 통화정책 팀장 한시현(김혜수)과 그에 맞서 재난의 해법을 다르게 제시하는 재정국 차관(조우진)이 있다. 둘째는 외환위기 당시 환란을 가장 정통으로 맞은 영세제조업체 사장 갑수(허준호)가 있다. 셋째는 외환위기를 발 빠르게 예측하고 역발상의 투자를 통해 엄청난 돈을 긁어모은 펀드매니저 윤정학(유아인)과 투자자들이 있다.

<국가부도의 날>은 재난을 감지하고 나서는 한시현의 눈을 통해 외환위기라는 재난의 본질이 무엇이고 당시 정부와 지배 엘리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갑수를 통해 당시 고통 받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남았고 현재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때 부를 축적하고 지금 존경받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민낯을 까보인다.

영화는 김혜수, 조우진, 허준호, 유아인 등의 호연에 힘입어 극영화로서 훌륭한 만듦새를 보이며, 외환위기의 본질을 묘파해내는 주제의식과 더불어 시대의 요청에 걸맞은 젠더의식까지 장착하여 상찬할만하다. 하지만 보수 일간지를 중심으로 영화가 팩트를 왜곡했다는 폄훼가 일어나고 있다. 특히 중앙일보의 <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는 영화를 ‘반기업 반미 정서를 부추기는 혹세무민형 정치영화’로 규정하는데, 이는 노골적인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방어로 읽힌다.



◆ 재난을 감지하고 나서는 여성영웅의 존재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제작되었지만 모든 인물과 사건은 허구로 재구성되었다’는 자막으로 시작된다. 그것도 모자라 한국은행 통화정책과는 ‘통화정책팀’으로, 재경원은 ‘재정국’으로, 한국은행 총재는 한국은행 ‘총장’으로 바꿔서 부른다. 허구가 섞여있음을 표시하기 위함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주인공 한시현 팀장은 허구의 인물이다. 당시 비공개 대책팀이 있었다는 설이 있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더구나 장차관급 회의에 영화에서처럼 한국은행 과장급이 참석한 예도 없으며, 그런 직책에 여성이 있었던 적도 없다. (당시 한시현 팀장과 같은 직책에 있던 실존인물은 정희전 통화정책 과장으로, 남자이다.) 외환위기를 가장 먼저 경고한 기관이 한국은행인지도 불확실하다. 당시 한은 간부가 ‘최근의 경제상황과 정책 대응 방향’이라는 보고서를 두고 갔었다는 당시 재경원 차관 강만수의 회고가 있지만, 그 밖에도 여러 경제연구기관에서 위기관련 보고서를 내놓았다.

자, 이런 것들이 사실과 다르다고 해서, 극영화에서 여성 팀장을 주인공으로 삼아 재난의 본질을 파헤치는 서사적 설정을 ‘팩트 파산’ 이라 비난할 수 있는가. 이는 영화 <1987>의 연희(김태리)가 허구적인 인물이라서 왜곡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 식이면 웬만한 역사적 사실을 다룬 극영화들은 모두 사실 왜곡 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영화는 한시현이라는 내부 관찰자를 통해 재난의 성격과 본질이 무엇인지, 당시 관료들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움직였는지, IMF와 미국은 어떤 입장이었는지를 알려준다. 혹자는 한시현이 주도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그의 모든 시도가 좌절되므로 주인공으로 부르기 부적합하다고 말한다. 이는 실제로 벌어진 역사적 사실이 있고, 그 테두리 안에서 행동하고 부딪히며 알아나가는 관찰자를 집어넣은 것이기 때문에, 그의 모든 제안이 상관에게 묵살되고 언론에서 침묵 당하는 것으로 그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는 재난을 알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그곳에 있는 것이다. 가령 <관상>에서 계유정란의 비극을 알고 있으나 막을 길이 없는 관상가나, 예언의 능력이 있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카산드라의 저주받은 운명과 같은 위치이다. 이는 또한 당시 그곳에 국가와 국민의 입장에서 사태를 알아보고, 어처구니없는 지배자들의 결정에 항의하고, 뭐든 해보려고 노력했던 단 한명의 깨어있는 관료나 전문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소망을 담은 존재이다.

그런 소망의 담지자가 여성으로 표상된다는 점은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이는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의사결정의 자리에 여성이 부재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한시현은 전문가적인 실력과 성실한 직업인의 태도 그리고 공동체를 생각하는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채 국가의 환란을 막기 위해 헌신한다. 재난을 제 때 알려서 피해를 최소화 하려하고, 일반 국민들에게 고통이 전담되는 폭력적인 방식이 아니라 연착륙할 수 있는 해법을 찾기 위해 뛰어다닌다. 하지만 그의 모든 노력들이 무용이 된다. 그의 의견은 처음부터 묵살된다. 여기에는 그가 여성이라는 점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이러한 시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한시현과 대극을 이루는 재정국 차관(조우진)이다.



◆ IMF라는 외부충격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꿈꾼 한국의 경제 관료들

<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에서 안혜리는 영화가 재정국 차관을 사익을 추구한 사악한 관료로 그렸다며 편파적이라고 비난한다. 당시 한국의 관료들은 IMF 구제금융으로 가는 것을 원치 않았고, 다른 방법을 강구해보았지만 좌절되었다는 사실을 꼽는다. 이러한 지적은 일견 타당하다. 당시 한국의 관료들은 IMF 행을 피하려 하였다. 위기를 감지한 한국 관료들은 11월초에 미국, 일본, 중국 등과 양자협상을 통한 차관이나 국채발행, 통화스와프 등을 시도하였다. 또한 IMF처럼 구조조정을 강제하지 않을 아시아통화기금(AMF)에 희망을 걸기도 하였다. 그러나 모두 좌절되었다.

IMF 구제금융 신청이 공식 검토된 것은 한국은행이 <외환유동성 사정과 대응방안>이라는 보고서를 낸 이후부터다. 논의는 대단히 빠르게 진행되어 불과 며칠 사이에 재경원 직원들 사이에서 IMF 행은 기정사실화 되었고, 관료들 중 반대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안혜리는 위 글에서 강경식 전 부총리와 김인호 전 경제수석이 IMF 행을 지연시킨 데 따른 책임을 추궁 받아 경질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강경식 부총리가 제출한 근본적인 개혁조치인 금융개혁법안이 한국은행의 격렬한 반대 속에서 전날 국회에서 부결된 것과 관련이 있지만, 후일 김영삼 대통령은 IMF 협상을 하는데 누가 더 적격인지를 고려한 경질이었다고 답하였다. 새로 임명된 임창렬 경제부총리는 1980년대에 IMF 대리이사와 세계은행 이사로 근무한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분위기 파악을 못한 임창렬 신임부총리가 취임 직후 IMF 구제 금융신청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발언으로 구제금융 신청이 며칠 늦어지는 해프닝을 빚기도 했지만, IMF 행이라는 대세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영화는 이처럼 며칠에 걸친 관료들의 우왕좌왕을 짧게 축약하고, 재정국 차관의 주도로 IMF행이 신속하게 결정된 것으로 그린다. 하지만 이런 묘사는 극영화에서 등장인물을 최소화 하면서 서사를 압축적으로 진행하기 위함이지, 차관을 특별히 악마적으로 그리기 위함이 아니다. 당시 경제 관료들은 IMF 구제금융을 반기지는 않았다하더라도, IMF 구제금융을 불가피한 선택으로 받아들였다. 에너지와 원자재 수입에 의존하는 한국경제의 특성으로 인해, 한국의 관료들은 채무불이행(디폴트)이나 모라토리엄(채무지급유예)은 거의 생각할 수 없었다. 영화는 김기환, 강경식, 강만수 등 1980년대와 90년대 초반의 국내 자유주의적 관료들이 자생적으로 추진했지만 실패했던 신자유주의적 금융, 기업, 노동개혁이 IMF의 개입이라는 외부적 충격에 의해 단기간에 완결된 아이러니함에 주목한다. 영화는 재정국 차관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러한 경제사적인 의미를 함축적으로 재현한다.



◆ 재경국 차관의 계급성

재경국 차관, 그는 어떤 사람인가. 안혜리는 영화가 그를 사악하게 그렸다고 비판하고, 어떤 이는 그의 욕망이 정확히 무엇인지 제시되지 않아서 실패한 인물묘사라고 품평한다. 하지만 둘 다 잘못된 생각이다.

차관은 당시 자신이 속한 주류 엘리트 사회의 사고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남성중심적이고 관료적인 관행과 습속에 젖어 별다른 성찰이 없을 뿐, 특별히 사악할 것도 없고 굉장한 사익을 추구한다고 볼 수도 없다. 그는 여자인 한시현을 무시하고 동료로 인정하지 않는다. “비서 아니었나?” “어디서 계집년이” 그가 속한 주류 사회에서 여성은 언제나 비서나 접대부였기 때문에, 여성을 전문 인력으로 대해본 적이 없는 엘리트 남성의 대응이다. 그는 하버드 MBA 동문임을 내세워, 재벌 2세와의 친목을 다진다. 이처럼 그는 대단히 고루한 주류질서와 사고를 대변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한국 사회의 후진성을 증오하며 외부충격을 통해서라도 개혁을 단행하겠다는 우파개혁주의의 입장을 지닌다. 그는 관치금융이 횡행하고 노사분규로 시끄러운 한국 사회를 후진적이라 규정하며, 자신이 유학하면서 보고 배웠던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선진화’된 사회를 꿈꾼다. 그는 외환위기를 지렛대 삼아,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관철시키고자 한다.

그는 국민들에게 함구하던 위기에 관한 정보를 재벌 2세에게만 준다. 그는 한국경제를 살리는 것은 어차피 대기업이므로, 재벌과 중소기업을 다 살릴 수 없으면 재벌을 살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가장 친재벌적인 정책을 채택하고 결국 재벌로부터 자기 자리를 보존 받는다. 이러한 묘사는 전형적이고 객관적인 묘사일 뿐, 영화가 그를 사악하게 그렸다는 주장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그저 친재벌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이념을 지닌 경제 관료의 계급성을 대변해서 보여줄 뿐이다. 그의 정책적 비전이 무엇이었고, 그가 욕망한 자신의 미래가 무엇이었는지 더 알고 싶다면 당시 재경원 차관 자리에 있던 실존인물 강만수의 사례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강만수는 이명박 정권에서 자신의 정책적 이상을 구현하였으며, 이후 산업은행장이 된다.

차관은 여성인 한시현이 감정적이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고 비웃지만, 이는 감정이나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성의 문제이다. 그는 자신이 친목으로 속해있는 주류 엘리트 남성사회의 이해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생각을 보인다. 한국의 후진성을 IMF의 손을 빌어 뜯어고치겠다는 차관에게 한시현은 “어느 나라 관료인가?”라고 되묻지만, 이는 오래된 식민주의의 논리이다. 가령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근대화된 시스템을 흠모한 친일 지식인의 생각도 이와 같았고, 참여정부 당시 한미 FTA를 적극 추진하면서 외부 충격효과로 한국경제의 체질을 개선하려던 관료들도 비슷한 사고의 소유자들이다.



◆ IMF, 혹은 미국의 복심

안혜리는 영화가 IMF 협상과 관련하여 미국이 배후에 있는 것으로 그리는 것은 부당하며, 단지 미국은 IMF의 최대 주주이기 때문에 협의가 필요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눈 가리고 아웅 격이다. 앞서 보았듯, 한국 관료들이 IMF 구제금융을 피하기 위해 벌인 여러 가지 시도들은 모두 무산되었는데, 이는 미국이 그러한 해법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지주형의 저서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듯이, 미국의 CIA는 1997년 8월에 이미 한국의 금융위기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한국에 경고하거나 위기의 확산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또한 일본 주도로 진행 중이었던 아시아통화기금(AMF)을 좌절시켰으며, 중국과 일본의 지원에도 반대를 표하며 사실상 한국의 자금줄을 막았다. 미국은 강력한 구조개혁과 전면적인 시장개방을 동반해야 하는 IMF 프로그램만을 통해 한국에 지원할 수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고, 중국과 일본도 이에 수긍했다. 이는 미국의 복심이 금융위기를 기회로 삼아 한국 금융 시장을 개방하고 한국 정부에 구조 개혁을 관철시켜 미국 자본의 투자 기회를 확대하려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IMF 이사회의 최대 주주이자 거부권을 지녔다는 사실은 IMF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힘이 미국에게 있음을 뜻한다. IMF는 국제기구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사실상 미국이 주도하는 달러-월스트리트 체제를 굳건히 하여 미국의 국익에 복무하는 기구이다. 영화에서는 한시현이 IMF 인사들과 미국 재무차관이 같은 층에 머물고 있음을 발견하여 항의하는 것으로 암시하였지만, 당시 IMF 인사들과 같은 호텔에 묵고 있던 립턴 재무차관의 개입과 배후조종은 훨씬 직접적이었다.



◆ 어떻게 살아남았나

갑수(허준호)는 외환위기의 충격파를 가장 직접적으로 맞은 경제주체를 보여준다. 그는 외환위기 직전 결제대금을 어음으로 받았고, 어음은 휴지조각이 되었다. 당시 이러한 처지에 놓인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거나 감옥에 갔지만, 갑수는 살아남았다.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영화는 갑수를 무고하게 고통 받는 피해자로 그리는데 그치지 않고, 그의 가해자성을 드러낸다. 이를 통해 영화는 CJ식 신파를 벗어나고, 피해자 서사를 넘어서는 성찰의 시각을 갖는다.

그는 가장 자신을 믿어주었던 채권자에게 어음폭탄을 던지고, 살아남는다. 그리고 자살한 채권자의 빈소에 와서 육개장을 먹는다. 우걱 우걱. 착한 사람 갑수는 그때 죽었다. 장성한 자식에게 “잘해주는 사람 믿지 마라, 아니 아무도 믿지 마라.”라고 말하는 그는 죄의식과 의심으로 가득한 사람이 되었다. 시스템의 피해자이지만, 생존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해자가 되기도 했던 그의 내면 풍경은 외환위기 이후 변해버린 민심을 대변한다. 이제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각자도생의 철학을 내면화한 채 몸부림친다. 외환위기를 겪고 글로벌해진 한국경제처럼, 그는 이제 이주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공장을 운영한다.

갑수의 아내는 영문도 모른 채 희망퇴직서류와 계약직전환서류를 받아든다. 당시 노동자들 중 정규직이 무엇이고 비정규직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IMF의 초기 개입이 실패로 돌아가 위기가 가중되자, 한국 정부는 IMF와 미국에 더 많은 것을 양보한 추가협정인 ‘IMF 플러스’를 맺었다. 초기협정에서는 모호하게 다루어졌던 노동시장 유연화가 추가협정에서는 구체적인 정리해고제 도입과 파견근로자제 입법 등을 담고 있었다. 이는 이후 노동시장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해고가 일상이 되는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자본시장 개방을 통해 자본가에게는 더 많은 이윤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그에 수반되는 비용의 대부분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려는 신자유주의의 기본 전략이 이렇게 완성되었다. 한국 노동계급 입장에서는 눈 뜨고 코 배인 셈이다.



◆ 지배층의 민낯

외환위기를 통해 한 몫 단단히 잡은 윤정학(유아인)은 투자의 귀재로 추앙받는 투자자가 된다. 하기야 그가 굉장한 베팅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의 예측은 단순히 실물경제의 분석을 통한 예측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의 모험에는 두 번의 고비가 있었다. 첫째는 대한민국이 위기관리 능력이 없다는 쪽에 베팅하였고, 둘째는 대한민국이 친재벌적인 개혁을 강제하는 IMF 체제로 갈 것이라는 쪽에 배팅하였다. 대한민국의 능력과 계급성을 묻는 두 번의 고비에서 그는 가장 절망적인 선택지에 돈을 걸어 999배당을 터뜨린다.



그의 가장 뛰어난 점은 “안 믿는다.”는 점이다. 정부가 무슨 말을 하든, 어떤 여론 몰이를 하든 안 믿는다. 외환위기가 국민들의 과소비 때문에 일어났으니 절약을 해야 된다는 둥, IMF 구제금융으로는 가지 않을 것이라는 둥, 금 모으기를 해야 한다는 둥의 모든 프로파간다를 거부하고 자신이 모은 정보를 바탕으로 독자적으로 판단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한국정부의 무능과 친재벌성, 그리고 언론의 속성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윤정학은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역발상의 투자로 부~자~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남들이 죽든 살든 돈을 긁어모으는데 몰두한 배금주의적 사상은 비판되지 않는다. 오히려 모두가 돈을 주고서라도 배우고 싶어 하는 사상이다. 그는 뼈 속까지 신자유주의자로, 남보다 앞서 각자도생의 이념을 선취한 선각자이다. 즉 지금 황금의 제국이 된 테헤란로를 누비는 지배층은 남보다 먼저 공동체 의식을 집어던진 사람, 남보다 먼저 국가의 존재를 부정한 사람, 남보다 먼저 다른 사람의 고통에 올라 탄 사람이다. 이는 갑수의 “아무도 믿지 마라”는 말과 더불어 신자유주의에 최적화된 인간형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 누가 크산드라의 예언을 들을 것인가

외환위기와 IMF 행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실패한 한시현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직서를 던지고 나온 그는 문밖에서 자신을 찾아온 오빠 갑수를 만난다. 한시현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알려야 된다”며 동동거릴 때, 구체적인 국민인 오빠에게 “어음 받지 마라”는 것만 알렸더라도 좋았을 것을. 한시현이 흘린 눈물에는 나라를 구하느라 가까운 사람도 챙기지 못한 회한도 있었을 것이다. 이후 한시현은 오빠를 도와 가정경제의 위기를 극복하고, 자기 생존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몇 가지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현재 한시현은 한국경제의 위기를 진단하고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는 재야 경제학자로 살아간다. 크산드라처럼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도 예언을 멈출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인 셈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한시현에게 가계부채 폭탄을 막아달라는 특명과 함께 기획재정부 관료들이 찾아오는 에필로그를 담는다. 자신의 젊은 시절을 닮은 의욕에 불타는 정의로운 눈을 가진 여성공무원(한지민)에게 끌린 그는 제안을 수락한다. 한시현이 1997년에 못한 올바른 개입을 2018년에는 할 수 있을까. 이십년 동안 대한민국은 그의 말에 귀 기울일 만큼 성숙해졌을까.

1987년 혁명으로 민주화를 이루었으나, 1997년 외환위기로 노동자들은 몫을 빼앗겨버렸다. 2016년 촛불 혁명 이후,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위기는 반복되고 혁명은 끝나지 않는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국가부도의 날>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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