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 박보영이 잃게 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누가 될까

[엔터미디어=정덕현] 마치 사랑에 대한 수학 방정식 같다. tvN 월화드라마 <어느 날 우리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는 작품이 내세우고 있는 일종의 약속 혹은 계약 속에서 이야기가 흘러가는 드라마다. 그것은 시한부 판정을 받은 탁동경(박보영)이 “세상 다 망해라! 다 멸망해버려!”라고 외치자 느닷없이 그날 새벽 멸망(서인국)이 저벅저벅 그의 집을 찾아 들어왔다는 그 설정부터가 그렇다.

판타지이고, 그런 설정이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 드라마는 그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재미를 허용한다. 그렇게 찾아온 인간도 신도 아닌 존재 멸망은 또 느닷없이 탁동경과 계약을 맺는다. 그 계약조건을 탁동경은 멸망 앞에서 하나하나 적어나가며 다시금 정리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죽기 전에 세상을 멸망시켜 달라고 하기

2. 계약한 100일 동안은 아프지 않을 것

3. 죽기 전에 멸망시켜 달라 외에 진짜 소원 하나 들어주기

4. 계약을 어길 시에는 그 순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

계약이란 양자가 서로 얻어갈 것이 있을 때 맺어지기 마련이다. 이 계약으로 탁동경이 얻어갈 수 있는 건 남은 100일 동안 시한부 판정을 만든 뇌종양의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는 일이고, 진짜 소원을 하나 멸망이 들어주는 것이다. 대신 탁동경이 해줘야할 일은 ‘죽기 전에 세상을 멸망시켜 달라’고 하는 일이다. 죽지도 않고 또 그렇다고 살아있다고도 할 수 없는 멸망은 죽고 싶어 한다. 세상의 멸망과 함께.

이 방정식에서 변수로 작용하는 건 탁동경의 심경이 바뀌어 ‘세상을 멸망시키고 싶지 않아’ 계약을 어기게 되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대신 탁동경 대신 그가 그 순간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죽게 된다. 멸망이 그 조건을 이야기할 때 탁동경은 떠올린다. 동생 탁선경(다원)을. 그 순간 탁동경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동생이었다.

그런데 이 계약조건을 다시 하나하나 적어 놓고 탁동경은 깨닫는다. 어떻게 해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죽게 된다는 것. 계약을 어겨도 죽고, 계약대로라면 세상이 멸망해 죽게 된다. 어느 쪽이든 탁동경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된다. 그게 누구든 간에.

그래서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는 애초부터 비극을 전제하고 있다. 탁동경은 비극의 주인공이다. 멸망이라는 존재가 내건 방정식 같은 계약 조건 때문이다. 그는 살아남으려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봐야 하고, 그게 아니라면 다 죽는 멸망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건 어쩌면 결국 누구나 사멸하는 우리네 유한한 인간의 잔인한 삶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죽음은 세상이 멸망하는 것과 다를 바 없고, 아직 죽지 않고 살아남은 이들은 늘 사랑하는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봐야 하니 말이다.

탁동경은 멸망이 제시한 이 복잡한 방정식 같은 계약조건을 들여다보며 그 문제를 풀어낸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멸망이 되면 그 누구도 잃지 않고 탁동경은 살 수 있게 된다는 걸 알게 된다. 그래서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리려 함으로써 그는 멸망을 시험한다. 그리고 결국 다급하게 탁동경을 붙잡아 세운 멸망이 사실 그가 말한 것과 달리 연민도 마음도 있다는 걸 알게 된 그는 이렇게 선언한다.

“먹지도 자지도 울지도 연민도 사랑도 마음도 없어? 인간이 아니라서? 난 있어! 난 인간이니까. 그래서 말인데 널 사랑해볼까 해. 그럼 나는 아무 것도 잃지 않고 살 수 있을 테니까.” 계약을 어기고 ‘세상이 멸망하게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멸망을 가장 사랑하게 되면 결국 죽게 되는 건 멸망뿐이다. 그것이 자신도, 동생도, 세상도 살 수 있는 방정식의 해법이다.

하지만 그 순간 멸망이 말한다. “그럼 제대로 하자. 날 위해 세상을 멸망시켜주고 싶어질 만큼.” 과연 진짜 멸망을 가장 사랑하게 된다면 탁동경은 그 방정식의 해법대로 할 수 있을까. 기묘한 사랑방정식을 담고 있는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추상적이고 다소 복잡하며 어찌 보면 우울한 세계관을 가진 드라마가 우리의 마음을 슬슬 끌어당기고 있는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이 드라마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멸망’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탁동경과 멸망이 서로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들은 우울과는 거리가 먼 활기 있는 삶의 에너지가 넘친다. 멸망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전제해놓고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더 소중할 수밖에 없는 삶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드라마. 그 독특한 방정식이 우리를 매료시키는 힘이 아닐까 싶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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