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와 아가씨’는 주말극 클리셰 범벅 ‘기생충’인가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에프티 그룹 회장 이영국(지현우)의 집에 박단단(이세희)은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의붓오빠인 박대범(안우연)이 사업한답시고 집까지 날려버리는 바람에 아버지 박수철(이종원)과 한바탕 싸운 후 가출한 그였다. 당장 길거리를 전전할 수밖에 없게 된 박단단은 그만큼 이 입주 과외교사 자리가 절실했고, 다행스럽게 그 집 막내아들 이세종(서우진)이 교통사고를 당할 뻔한 걸 구해냄으로써 그 집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그 집에 아버지 박수철도 이영국의 계모인 왕대란(차화연)의 운전기사로 들어가게 됐다. 살 집이 없어진 그는 그래서 이영국의 집에 기거하며 일하고, 그의 아내 차연실(오현경)은 집주인 모르게 박수철의 숙소에서 지낸다. 서로 같은 집에 들어와 있다는 걸 모르던 박단단과 박수철은 그 사실을 알고는 곤혹스러워한다. 이전에 그 집의 가사도우미와 운전기사가 가족인 사실을 숨겼다 들켜 쫓겨난 일이 있어서다.

이쯤 되면 KBS 새 주말드라마 <신사와 아가씨>에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일게다. 대저택에 온 가족이 의탁해 살아가게 되는 이야기. 물론 <신사와 아가씨>가 <기생충>과 유사한 건 딱 거기까지다. 그렇게 우연하게 딸과 아버지가 서로 모른 채 한 집에서 만나게 된다는 그 설정만으로도 <신사와 아가씨>가 가진 주말드라마 클리셰를 금세 눈치 챌 수 있다.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주말드라마이기 때문에 그러려니 넘어가는 상투적인 코드들의 연속이다.

<기생충>이 반지하와 지상으로 나뉘어진 서로 다른 계급 구조의 부딪침을 블랙코미디로 신랄하게 꼬집었다면, <신사와 아가씨>는 이런 서로 계급 구조를 지극히 보수적이고 상투적인 신데렐라 이야기로 처리할 심산이다. 아내를 먼저 여의고 세 아이들을 홀로 키우는 이영국은 마치 <사운드 오브 뮤직>의 폰 트랩 대령이 주말드라마 버전으로 들어와 있는 듯한 인물이다.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아이들에게 엄격하기만 한 이 인물 앞에 나타난 박단단은 그래서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대령집 가정교사로 들어간 마리아 같다.

박단단은 그래서 엄마를 잃어 흔들리는 아이들을 마치 진짜 엄마처럼 보듬어준다. 폭풍우 치는 날 무서워 울고 있는 이세종을 안아 재워주고, 학교에서 지속적인 왕따 괴롭힘을 당해온 이재니(최명빈)를 위해 일진들을 때려 눕혀준다. 그리고 이영국에게 “아이들도 감정이 있고 아픔이 있다”며 일갈한다. 집도 절도 없이 떠돌다 입주 가정교사로 고용되어 그 집에 들어간 박단단이지만 이영국 회장은 조금씩 아내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그에게 손을 내밀 가능성이 높다.

주말드라마가 보수적인 가족주의를 지속적으로 그려왔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물론 간간이 <황금빛 내 인생>처럼 가족보다는 내 인생(개인)이 중요하다는 진보적인 이야기를 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과거 가족주의에 대한 향수로 채워져 왔던 게 사실이다. <신사와 아가씨>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난한 아가씨는 결국 부유한 신사에 의해 천거될 것이다. 그것을 사랑의 힘으로 그려내는 게 보수적인 가족주의의 틀이다.

하지만 <기생충>이 적나라하게 그려낸 것처럼,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계급화의 경계는 냄새의 침범조차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첨예하다. 사랑의 힘으로 포장되어 신데렐라가 탄생할 거라는 판타지는 결코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며, 자칫 저 세계를 공고하게 하기 위해 박탈감을 느끼는 서민들에게 던져주는 허상일 가능성이 높다.

<신사와 아가씨>는 바로 그런 현실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판타지와 허상들을 ‘가족애’, ‘사랑’ 같은 걸 담은 클리셰들을 통해 그려간다. 이재니가 왕따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이 나올 때부터 이미 우리는 박단단이 그걸 해결해줄 거라는 걸 알고 있고, 그 많은 여자들이 이영국을 남편으로 사윗감으로 보며 싸우고 있지만, 결국 그는 박단단을 천거할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건 이제 주말드라마의 오래된 클리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말드라마인 <신사와 아가씨>가 그 클리셰 드라마의 하나라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이야기 구조가 비슷한 <기생충>과 이 주말극이 얼마나 다른 방향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가 하는 그 엄청난 차이에 묻어나는 세계관의 차이다. 한쪽에서는 섞일 수 없는 계급 구조를 치열하고 신랄한 비판의식으로 바라보고 있다면, 다른 한쪽에서는 적당한 클리셰를 섞은 신데렐라 판타지로 덮어 포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과연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 같은 자본화된 사회의 계급구조에 공감대를 갖게 된 대중들이 여전히 <신사와 아가씨> 같은 옛 판타지 클리셰의 향수를 공감할 수 있을까. KBS 주말드라마만이 허용된 이 판타지의 세계는 언제까지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현재의 드라마들 속에서 KBS 주말드라마가 외부와 단절되어 시간의 흐름이 멈춰진 하나의 고립된 섬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KBS, 영화 <기생충>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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