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 문제적 인물 옥자연의 아찔한 선 넘기에 담긴 것들

[엔터미디어=정덕현]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수히 많은 선들이 있다. 영화 <기생충>에서는 ‘냄새’ 같은 보이지 않지만 선을 넘는 어떤 것들이 주는 아찔함과 불편함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가 갖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선을 끄집어낸 바 있다. 다 똑같은 사람들이지만 가진 것에 따라, 하는 일에 따라, 또는 태생적으로 저 마다의 넘지 않아야할 선 같은 게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세상. 그 선을 넘는 일은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긴장감을 유발하는 극적 재미를 주면서도 동시에 우리 사회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지점이 아닐 수 없다.

tvN 토일드라마 <마인>은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선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재벌가 효원그룹의 대저택은 카덴차와 루바토라는 이름을 가진 두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카덴차에는 첫째 며느리 정서현(김서형)이 살고, 루바토에는 둘째 며느리 서희수(이보영)가 산다. 정서현과 서희수는 그 태생 자체가 다르다. 정서현은 태생적으로 재벌가에서 나고 자란 인물이지만, 서희수는 여배우로 성공해 효원가 차남 한지용(이현욱)과 사랑에 빠져 결혼한 인물이다. 정서현은 동성연인을 사랑했지만 재벌가의 삶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일찍이 이를 포기하고 살아가는 인물이고, 서희수는 재벌가에 들어와서도 그 완고한 시스템에서 자유롭게 살려는 인물이다.

‘보이지 않는 선’의 관점으로 보면 정서현은 결코 누군가 선을 넘어오는 걸 용납하지 않는 인물이라면, 서희수는 재벌가의 고용주와 메이드 사이의 명백한 위계로 구분되는 선도 어느 정도는 열어 놓는 인물이다. 그래서 서희수의 선을 새로 들어온 튜터 강자경(옥자연)이 슬금슬금 넘어 들어온다. 처음에는 그것이 아이 하준이(정현준)의 튜터라는 직업에 충실하기 때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차츰 강자경은 그 선을 넘어 들어온다. 튜터를 넘어 엄마라는 선을.

선을 넘어 들어오는 강자경에게 불편함을 느낀 서희수가 ‘엄마의 영역’을 넘어왔다고 경고하자, 강자경은 “아무리 잘해줘도 친엄마의 온기와는 다를 것”이라며 서희수가 제아무리 노력해도 하준이의 친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은 한계가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엄마의 영역’을 두고 부딪치는 강자경과 서희수의 칼날이 오고가는 말들 속에는 기묘한 아찔함과 불편함이 공존한다. 과연 강자경이 도대체 뭐길래, 튜터이면서 ‘친엄마의 온기’를 운운할까. 시청자들로서는 그가 혹여나 죽었다고 이야기되는 하준이의 숨겨진 친엄마가 아닐까를 짐작하게 만든다.

만일 강자경이 하준이의 친엄마라면, 강자경과 서희수 사이에는 하준이를 가운데 놓고 복잡한 보이지 않는 선들이 겹쳐지게 된다. 강자경과 하준이 사이에 피로 얽힌 친엄마와 자식이라는 선이 있다면, 서희수와 하준이 사이에는 결혼으로 공인된 엄마와 자식이라는 선이 있다. 마치 솔로몬의 선택을 보는 듯한 장면이 이어진다. 이 보이지 않는 선의 부딪침 속에서 서희수가 강자경에게 자신이 하준이을 위해서는 못할 게 없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느닷없이 강자경이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던진다. 마치 아이를 위해 아이를 포기했던 솔로몬의 선택에 등장하는 친엄마처럼.

강자경과 서희수 사이에서 보이는 선들처럼, <마인>이라는 드라마의 묘미는 효원가 전체에 깔려 있는 보이지 않는 선들의 부딪침과 갈등에서 만들어진다. 회장이 쓰러지고 누가 임시로 대표직을 맡을 것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이사회에서도, 장남 한진호(박혁권)과 차남 한지용은 표면상 형제지만 배다른 형제라는 점에서 보이지 않는 선이 놓여 있다. 한지용은 마치 효원가를 위해 한진호에게 임시 대표 자리를 양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한진호에게 “지금은 형 자리가 맞아”라고 말함으로써 그것이 그의 큰 그림 안의 한시적 선택이라는 걸 드러낸다. 결국 한진호를 세운 것도 바로 자신의 뜻이었다고 한지용은 말하는 것.

메이드 김유연(정이서)의 방을 밤마다 찾아와 그 곳에서 자게 해달라고 하는 효원가의 장손 수혁(차학연) 역시 이 두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선을 넘는다. 단지 잠이 잘 잘 수 있다는 이유로 김유연을 방을 찾는 것이지만, 이 사실은 다른 메이드에 의해 정서현의 귀에 들어감으로써 향후 어떤 파란을 예고한다. 메이드들은 방 하나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선이 존재하지만, 고용주들은 심지어 침실까지 마음대로 들어와 잘 수 있는 부조리한 구조 속에서 피해는 온전히 메이드들에게 지워진다.

하지만 만일 수혁이 방만을 찾은 게 아니라 김유연을 찾게 된 것이었다면 어떻게 될까. 김유연에 가해지는 어떤 부당한 처사는 수혁 역시 누군가 자신의 사랑(혹은 마음)하는 마음에 선을 긋는 행위처럼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여기에도 두 개의 선이 존재한다. 직업적 영역과 마음의 영역. 두 선이 겹쳐지면서 갈등은 커질 수 있다.

<마인>은 효원가를 통해 우리네 자본주의 사회가 갖고 있는 무수히 많은 선들을 보여준다. <기생충>에서는 냄새를 통해 그 선의 존재를 담았다면, <마인>은 색으로 그것을 표현한다. 검은 색과 흰 색이 분명히 나뉘어 있는 것처럼 보이던 효원가가 어느새 조금씩 ‘회색의 지대’가 생겨나고 있다는 걸 말한다. 이런 회색의 지대를 현재 가장 선연하게 드러내는 인물은 강자경이다.

그의 선 넘기는 아찔하면서도 불편하다. 하지만 거기에 담긴 어떤 숨겨진 비밀들이 드러날 때 우리는 과연 분명해 보였던 선이 진짜 분명했던 것인가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 이미 회색의 지대가 어디든 존재한다는 걸. 팽팽한 긴장감과 극적 갈등을 담아낼 <마인>이 그걸 통해 그려낼 우리 사회에 대한 은유가 어떤 방식으로 표현될지 자못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tvN, 영화 ‘기생충’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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